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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팍 Apr 02. 2024

무모해보여도
긴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다.

정든 팀을 떠나다.

회사의 경영악화로 팀원 전체가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

이미 얼추 사정을 설명받은 터라, 놀라지는 않았다.


실업급여는 나올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처음 뵙는 인사팀의 직원분께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자상함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셨다.

두 감정이 하나의 표정으로부터 동시에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쨌든 미소 덕분에 나도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곱씹어 삼킬 수 있었다.

그래, 실업 급여는 나올 만큼 버텼구나.


복잡한 표정은 분명 나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당황스러움과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려는 불안한 눈빛.

어쩌면 팀 전체가 이 불안정한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그 표정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저, 계약서라는 거울이 나를 비추었기에 나도 내 감정을 마주한 것일 뿐.



첫 고민은 아니었다.


이런 불안정함은 이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 잠시 심리 상담의 도움을 받았다. 금방 상황도 잠잠해졌고,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아 4회차가 되는 날 그만두기로 했다. 다음에 또 올게요, 하자 선생님께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다.

금방 정이 들어버리는 내 성격에, 0.3초간 서운했다가 '그래, 맞다.' 동조하며 홀가분하게 센터를 떠났다.

불안감이 떨쳐진 그 상황이 내게 큰 고비를 넘은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상담센터를 떠나면서 생각해보니 만날 필요가 없는 고비였다.

다시 이런 고비가 찾아온다면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겠다고도 다짐했다. 


지금은 심리 상담이 필요하지는 않다. 지금 내가 겪는 상황 자체가 무척 불안정한 상황임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 내 마음이 유달리 유약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덕분에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질 수 있었다. 나는 약하지 않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상황이 종종 찾아올 뿐이다. 상담을 받으며 배운 유용한 교훈 중 하나다.


반복되는 회사의 일상이 나를 유약하게 만들었고, 그런 상태를 틈타 외부의 큰 변화가 나를 크게 흔들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때 이미 나는 떠나고 싶은 마음의 싹이 틔었었다. 더 굳건하게 팀에 헌신할 팀원들을 남겨두기 위한 CTO님의 큰 그림인가? 우습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돌이켜보면

우리 팀은 좋은 팀이었다.


내가 떠나기로 결심하고 이 사실을 알리고 나서야 후회감이 밀려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좋은 팀원들과 편한 업무환경에서 배우며 일한다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다.

어쩌면 팀을 나오기로 결정한 것은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차는 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확할 때가 가까워진 과일이 약한 바람에도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 결심도 자연스럽게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싶다.


과일은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영글은 영양분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저장할 수 있는 모든 영양분을 그 안에 저장했기 때문에 그 다음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떠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나무에 매달린 채 까치밥이 되는 것도 분명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과일에게 그 다음 사명은 또한 씨앗의 싹을 틔우는 일이고, 까치가 씨앗을 멀리 옮겨줄테니까.



어떤 씨앗은 그늘진 땅에 떨어져 썩어 버렸고
어떤 씨앗은 그대로 새의 먹이가 되었고
어떤 씨앗은 영글은 땅에 뿌려져 새싹을 피웠다.



내가 떨어진 땅은 취업 시장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흉년이 든 메마른 땅일 것이다.

그러나 보금자리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더 긍정적이다.

나는 모아둔 돈도 있고, 편히 작업할 공간도 있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집도 있다.

게다가 때마침 맞이하는 봄 기운에 마음이 병들 틈도 없을 것이다.


땅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이제 씨앗의 몫이다. 지치지 말고 볕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뿌리를 다지는 시간이다. 그리운 나의 모체-퇴사하게 된 회사와 팀-로부터 떨어져나온 이상, 나는 고독하게 성장해야 한다.

모체와 다르게 처음부터 말이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내고, 연약한 잎과 가지를 가진 채로 아프게 고독하게 다시 또 폭풍우를 맞고 겨울을 맞고 그렇게 아프게 성장해야만 한다.


이 선택이 분명 가치가 있는 선택이라고 믿는다.

나를 나답게 하는 선택이었기에 그 자체로 소중하다.

모든 열매가 스스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나무는 병들고 말 것이다.

땅에 떨어진 고독한 나의 신세. 이별은 슬프나 아주 자연스럽고 경이롭다.


한데 나는 과일이 아니다. 긍휼이 여겨질 필요도 없고 자연의 섭리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두 팔과 다리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증명의 형태는 성장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에 훌륭한 결과물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꾸준히 나의 방향에 맞게 한발한발 뿌리를 뻗고 가지를 뻗어 성장할 것이다.

팀과 함께 성장하는 사람들보다는 분명 느릴지도 모르겠다. 느리더라도 내게 맞는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면 분명 나도 열매를 맺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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