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전 Apr 12. 2020

'교육과정, 수업, 배움' 그리고 '나'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인식의 전환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고요했다. ‘고요하다’는 것은 평화롭다거나 행복했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알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어떤 생명체의 잠든 상태라고나 할까. 그렇게 어린 나는 생각이 멈춘 채로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아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장사를 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그 시절로서는 풍요롭다고도 할 수 있는 살림살이로, 먹고 입는 걱정 없이 형제자매도 5남매로 왁자지껄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었으니, 한 편으로는 온실 속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투철하고 돈에 있어서 너무나 구두쇠였던 아버지와 남자 못지않게 대쪽 같은 성격을 가졌지만, 딸들에게도 끝까지 교육을 고집했던 어머니 슬하에서 나는 너무나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말을 잘 듣는 아이로 그야말로 ‘고요하게’ 청소년기를 보냈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세, 가정을 돌보는 일, 자식들을 키우는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옛날 사람'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는 어머니의 의지대로 - 어머니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었다 - 사범대로 진학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정해진 수순을 밟듯이 그렇게 교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긴 잠에서 깨어나기


단지 정해진 길을 가듯 별다른 갈등 없이 교직에 들어서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나는 내가 가르치고 있던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을 때에는 나 자신도 그냥 단순하게 가르쳤고 자부심이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만큼 나 자신도 복잡해졌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또한 정신없이 복잡해지면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도 덩달아 복잡해져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내 기억에는 ‘열린 교육’이 시작된 즈음인 것 같은데, 조금씩 아이들이 개방적으로 되어갔고 나 또한 ‘수업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아이들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의 아이들, 아니 나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문화를 가지고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교육이론들에 대해서는 학부 시절에 교직과목으로 배웠지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나 자신부터 건성으로 대하였고 또 그 당시(1980년대 초반)에는 수업 방법에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았었다. 다만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전공과목에 대한 지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현장의 교사들 또한 교육학이나 수업 방법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 부족하기도 하여 ‘열린 교육’이 시작되자 소수의 교육 현장은 다소 엉뚱하게 바뀌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일부 교사들은 열린 교육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으로 산만한 교실 분위기, 방관적인 교육 등이 연출되기도 하여 교육 현장은 한동안 어리둥절했었다.


그 뒤로도 많은 시간이 지나왔지만 오히려 교사들을 에워싸고 있는 지금의 교육적 상황이 그때보다 더 나빠진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이들은 개구리 튀는 방향처럼 더 가늠하기 힘들어졌고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는 학교와 교사에 대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할 수 있는, 신속한 교육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초유의 사태라고 할 수 있는 '온라인 개학'은 일종의 천재지변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교사들이 지속적으로 시대적으로 요구받고 있던 '신속한 교육적 변화'를 보다 더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이다. 그 ‘아이’들이 어린이건 대학생이건 앞으로 이 나라와 사회를 짊어지고 나아갈 차세대들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교육은 그 ‘아이’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우리와는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나 내가 그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나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내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교실'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사들 아니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딜레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말하자면 지금 현재의 교육은 아니 교사라는 직업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나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예측하기 어려운 아이’들인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내가 교육경력이 10년쯤 되었을 때부터 내가 고민하기 시작했던 화두였었다. 도대체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육이란 무엇일까?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서 교사로 서 있을까? 단지 직업으로서? 무엇을 위해서? 교사로서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들은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들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한 다음 교사로서 적지 않은 경력을 쌓은 이후에야 내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너무나 감사하게도 생각되지만, 고요했던 나의 어린 시절, 청소년기, 대학 생활과 같은 내 인생의 소중한 보석 같은 시기들을 나는 단지 내게 주어진 당연한 내 인생의 수순으로 받아들이고 고민 없이 - 뭐 소소한 고민들이야 당연히 있었겠지만 -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게 무언가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그 고민거리가 바로 내게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서있는 교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특히 수업이 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사로 걸어가고 있는 내 싦에서 마치 그제서야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이 나를, 나의 교사로서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3. ‘교육과정수업배움’ 그리고 나


'less is more'라는 말이 있다 적으면 적을수록 많은 것을 얻는다는 뜻이다. 교육과정 분야에서 이 말은 '교과의 교육내용을 줄이면 줄일수록 학생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수업은 교육적이어야한다.' 수업자는 내가 하고 있는 활동이 목표달성에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는 점보다는 얼마나 교육적인가 하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교사가 매 시간 수업에서 수업목표와 교육목표를 함께 지니고 교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움은 무엇을 성취했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어떤 가치있는 것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대현. 교육과정, 수업, 배움, 교육과정 과목의 교수·학습 자료집 Ⅰ.  2014.>



그러다 '교육과정, 수업, 배움'을 읽고는 문득 나야말로 그동안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적인 가르침보다는 다만 수업의 방식과 겉모습의 변화나 발전이 교육 활동의 전부(?)라고 착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가 수업에 고민이 되던 그즈음부터 나름대로 노력을 끓이지 않고 해왔다. 어떻게 하면 보다 수업을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수업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등등의 질문도 계속하면서 해결책도 모색하였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속 시원하게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후에도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애써보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결국은 ICT 교육이니, 유비쿼터스니 교실 수업 개선이니 하는 흐름을 타고 나도 교육의 본질보다는 교육의 겉모습 변화에 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업에 대한 고민을 변화된 ‘아이들’, 변화된 ‘사회’와 함께, 그 속에  서 있는 ‘나’와 관련지어 변화를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나 홀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며 나의 입장과 나의 편리를 중심으로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내가 참고했던 여러 서적들 속에는, 수업을 할 때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아이’들 입장에서 계획하고 실천하고 연구해야 함을 강조하기도 하고 분명한 교육적 목적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오로지 ‘도구적인 교육의 변화’만이 지금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해 낼 수 있다고 암암리에 신봉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나는 ICT, Web, SNS 등을 활용한 수업이나 영상 활용 수업과 같은 다른 도구를 활용한 수업을 꽤 좋아하고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지겹지 않은 수업을 해 보려는 나의 노력의 방편이다. 나 자신이 너무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편하게 농담도 잘하지 않고, 가진 생각도 고지식하며,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게 이야기 한 편 건네지 않는다. 이런 나의 성격은 교사로서 커다란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나의 약점을 나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재미있게’ 수업을 해 보려고 다른 도구들을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아이들도 그런 수업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럭저럭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료의 홍수 속에서 내가 교육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수업에 대한 고민의 중심에 ‘아이’들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거꾸로 나는 항상 수업을 고민할 때 ‘가 어떻게 수업을 할까?' 하고 생각했다. 우습지만 ''가 어떻게 가르치는가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이들'이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나를 무척 우울하게 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교육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저절로 생각해 왔으며 내가 ‘교사’가 되었어도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아예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그것을 깨달아 ‘아이들의 배움’에 수업의 초점을 맞추려고 해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한다.


최근 교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시도들과 교육학 및 교과교육학 부분에서의 새로운 교육이론들에 대한 경험은 그동안 교사들이 나름 학교 현장에서 고민해왔던 것에 대한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방향 제시를 해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또한 주어진 교육과정의 분량이나 내용에 대하여는 교사 한 사람의 힘으로 크게  변화시킬 수 없겠지만, 적어도 수업을 할 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수업보다는 가치있는 내용, 아이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고민하고 그에 따른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를 추구하면서 '아이들의 배움'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수업을 계획하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가능할 것이며 동시에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즐거운 수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시대의 소중한 가치들을 향한 한 사람의 교사가 가지고 있을 시선이 너무나 기대되는 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수레바퀴 아래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