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금요일 네시"
스타벅스에서는 음료를 건넬 때 주문한 손님의 닉네임을 불러준다. 엊그제 커피를 기다리는데 픽업대의 전광판에 ‘금요일 네시’라고, 누군가의 닉네임이 떠 있었다. 그이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내 음료가 나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서, ‘금요일 네시’라는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금요일 네시라니. '와, 멋지다.' 맘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일주일의 끝 무렵, 이제 한 주가 끝나가고 곧 주말로 들어가는 시간. 회사원이라면 퇴근 후에 무슨 일을 할지 기대감이 빵처럼 부푸는 시간. 주말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상하며 마음이 풍선 같아지는 시간.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저 좋기만 한 금요일 오후 네 시.
커피를 들고 스타벅스의 무거운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는 문. 문을 닫고 빠져나오면 뒤에 남겨진 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잠시 있을 수 있는 그런 문. 만약에 평일과 주말 사이에 문이 있다면 아마 금요일 오후 네시쯤이 아닐까. 닉네임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꽤 근사한 사람일 거라고 확신한다. 그는 아마 금요일 네시를 기다리면서, 금요일 네시를 무척이나 애정하는 사람일 것이다. 금요일 네시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닉네임을 지을 때 자신이 바라는 것을 투영하기 마련이다. 나의 닉네임은 '짝은 언니'인데 파트너들이 가끔 왜 짝은 언니인지 묻기도 한다. 집에서는 장녀이고, 밖에서도 나는 큰언니 역할을 주로 해왔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는데 살다 보니 그래졌다. 무슨 일이든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 내가 하는 편이 안심이 되었다. 또 책임감이 강해서 본인 신세를 들들들들 볶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는 언니들보다 동생들이 늘 많았다. 어느 날 큰언니가 부담스러워졌다. 이제 큰언니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끌어나가는 큰언니 뒤에서 조곤조곤 동생들을 다독이며 따라가는 작은 언니가 되고 싶었다. 작은 언니보다는 짝은 언니가 왠지 더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져서 '짝은 언니'라고 지었다. 닉네임이 그렇다고 해서 짝은 언니가 되지는 않았다. 살아온 게 그렇다 보니 여전히 나는 큰언니로 살고 있다.
세라, 은자, 짝은 언니. 나에게는 여러 가지 닉네임이 있다. 담고 있는 의미도 다 다르다. 그런데 '금요일 네시'를 보고 나서 닉네임을 바꾸고 싶어졌다. 금요일 네시 반으로 할까? 금요일 다섯 시? 나는 일주일 중에서 어떤 요일, 어느 시간을 제일 좋아할까? 생각해 본다. 주말 내내 지지고 볶던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월요일 아침 여덟 시가 제일 좋다. 그렇지만 설레는 걸로 따지면 금요일 네시가 제일 설렌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네시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든 나를 만나러 오는 당신이 설렜으면 좋겠다. 나를 만나면 무거운 고민도 잠시 잊을 만큼 신났으면 좋겠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은 당신이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헤어질 때는 아쉽지만 다음에 또 만날 그날을 기다리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금요일 네시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닉네임은 바꾸지 않아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