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는 없어요
그래놀라를 구웠다. 그릭요거트에 그래놀라만큼 훌륭한 토핑은 없다. 마침 집에 굴러다니던 오트밀도 처리할 겸 오랜만에 굽고 싶다는 마음이 요동쳤다. 약속시간이 좀 촉박했는데 시간이 20분 미뤄졌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부지런히 그래놀라를 굽고, 식히기 위해 쟁반에 널어 놓고 약속에 다녀왔다. 돌아와서 그래놀라를 먹었는데 내가 원하던 그 맛이 아니었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적당히 쌉싸름 한데 전혀 바삭하지 않다. 식감이 눅눅하다. 뭐가 잘 못되었을까? 전에도 여러 번 구워봤었고 실패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식감이 눅눅하다. 머릿속에 비디오테이프를 되감아 보았다.
1시 20분에 점심 약속이 있었고, 재료를 꺼낸 시간은 11시 50분쯤. 시간이 조금 촉박했지만 마음먹은 것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성격의 나는 미뤄두지 않고 재료 손질은 시작했다. 전에 사용하던 레시피는 못 찾겠기에 맘이 급한 나는 다른 레시피를 열었다. 손이 빠르니까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나? )
오트밀에 각종 견과류와 올리브유를 두르고, 메이플 시럽과 시나몬 가루를 넣고 잘 섞었다. 오븐은 150도로 예열하고 팬에 재료를 담았다. 한 번에 굽기에는 양이 많고 두 번에 나눠 굽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다. 예열된 오븐이 아까워서 오트밀을 조금 더 넣어 양을 늘려서 두 번에 구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오트밀을 두 주먹 넣었다. (이게 문제일까? 계량을 안 해서?) 오트밀을 더 넣으니, 오일도 시럽도 더 넣어야 할 것 같아 휙휙 두 바퀴씩 더 넣었다. '몸에 좋은 올리브오일이고, 메이플 시럽이니까 많이 넣으면 더 맛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아! 이거다.)
메이플 시럽과 올리브오일, 그리고 마지막에 두른 꿀까지, 액체의 양이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븐을 다시 예열했다. 150도에 5분씩 더 구웠다. 구워서 식혔는데 여전히 눅눅하다. 전자레인지 기능으로 데우면 수분이 날아간다고 해서 다시 전자레인지로 2분씩 돌렸다. 아직도 그래로이다. 전기세도 아깝고, 내 시간도 아깝다. 더운 날씨에 땀이 삐질, 나도 덩달아 구워졌다. 몸보다는 마음이 구워지고 있다. 다시 140도로 예열해서 10분씩 구웠다. 이 글을 쓰면서 오븐을 돌려서 식히는 중이다. 아직 결과는 알 수 없다. 바삭해지라는 그래놀라 대신 내 마음이 바삭해진다.
내가 실패했다는 걸 참을 수 없는 집요한 나를 마주한다. '실패'와 '성공'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진다. 그래놀라를 맛있게 구운 것에 만족한다면 '성공'이었을 텐데, 바삭하지 않다고,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늘 그래놀라 굽기는 '실패'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의 오늘이 성공했느냐는 나에게 달려있다.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아직 그래놀라는 먹어보지 않았다. 바삭해졌을지 아니면 아직도 눅눅한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금 달라졌다. 바삭하지 않아도 잘 구워졌다고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삶이 이렇게 간단하다니. 내 삶의 성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그래놀라를 굽다가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