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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esa Dec 19. 2022

Otro buen día

Español,  기회의 언어

스페인어 시험이 제일 쉬웠다.

응시자가 없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어에 접근하도록 유혹하기 위해, 제2외국어 시험 출제자들이 제공하는 기회이자 선물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합격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게 웬 떡이여' 하며 스페인어 문법서부터 집어 들었다. 그렇게 인생이 또 다른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100군데도 넘게 보냈다. 운 좋게 면접까지 간 곳은 10곳 정도. 절망적이었다. 하반기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 최종면접까지 올라간 한 회사에 모든 것을 걸었다. 피면접자는 나를 포함해 총 3명. TO를 정해놓지 않았던 터라 잘하면 셋다 합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면접장 분위기는 그다지 경쟁적이지 않았다.

"Teresa 씨.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앗싸. 아는 내용이다. 신나게 답변을 했다. 면접 후 다른 두 명에게서 '네가 면접 제일 잘 봤다'는 칭찬까지 들으며, 드디어 구직생활의 끝이 보이는구나 기쁨에 가득 찬 며칠을 보냈다. 김칫국을 도대체 몇 사발을 들이킨건가. 나를 제외한 두 명이 합격하고 나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충격이 적잖이 밀려왔다.

'이쯤 했으면 됐다. 그만 하자.'

출처 : 픽사 베이


면접으로 인정받기 힘들면 시험으로 취직을 도전해볼까. 축 처진 어깨,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노량진의 한 학원을 찾아갔다. 우연히 보게 된 전단지에서 국제법, 국제정치학을 수험 과목으로 지정한 공무원 직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제법은 나의 희망이었지. 국제정치학은 대학원에서 꽤 공부했지. 도전할만하다. 그런데 제2외국어도 시험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언어를 새롭게 배우려면 짧은 시간에 합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영어를 10년 넘게 배워도 이 정도인데.


"스페인어 시험은 쉬워요."

학원 상담사의 솔깃한 정보가 귀에 쏙 들어왔다. 일본어, 중국어 같은 인기 있는 언어에 응시생들이 몰리니, 스페인어를 쉽게 출제해서 선택 언어의 적절한 분배를 목적으로 둔 것 같다고 했다. 수능 시험 제2외국어의 난이도라고. 이유가 뭐든지 나는 '땡큐.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정도 되면, 공무원 시험을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취직이 절실했던 28살 취준생은 선택의 여지도, 고민할 에너지도 없었다. 그렇게 노량진을 방문한 지 단 이틀 만에 취준생에서 고시생으로 전향을 하였다.




아무리 쉽다고 해도 알파벳부터 시작하는 초심자에게 스페인어는 수험생활의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다른 과목을 제쳐두고 스페인어에 투자할 시간도 없었다. 매일 아침 30분씩 단어 암기, 매주 토요일 학원에서의 문법 수업이 스페인어에 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초급 문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영어 문법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스페인어 문법 초급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어는 읽기가 쉽다. 내용을 몰라도 알파벳 원칙에 따라 읽으면 스페인어를 말할 줄 아는 것이다. 아랍어, 러시아어가 상형문자나 암호처럼 보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언어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로 언어 통달의 자아도취가 가능한 언어가 스페인어였다.


에휴 무슨. 한 나라의 언어가 그리 호락호락할 쏘냐. 콧방귀 뀌는 스페인어가 나를 보며 비웃는 것 같았다. 진도가 나갈수록 영어와의 공통점도 서서히 사라졌다. 언어를 즐기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기에, 불안하지만 시험 빈출 내용만 골라 무한 반복했다. 아는 것만 확실히 알고 가자. 그렇게 1년 5개월 만에 국가직 7급 시험에 합격했다. 스페인어는 100점 만점에 90점. 알파벳도 모르던 수험생이 짧은 시간에 거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고맙다 얘야. 네가 나에게 Otro buen día(좋은 날)를 선물해 준 것 같구나.  


출처 : 픽사 베이


직장에서는, 각 직원이 선택한 제2외국어 관련 국가에 2-3년 정도 파견을 보낸다. 직장 생활 적응만으로 힘든 날들이었기에 잠시 연필을 놓고 있었지만 스페인, 또는 중남미 어딘가에 파견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상상하면 더 이상 스페인어 공부를 늦출 수 없었다. 또다시 시작이었다. 원어민 앞에서 진땀 빼는 시간들. 머리가 저려오며 좌절을 맛보는 시간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스페인어가 어렵지만 버겁지는 않다. 못하지만 즐길 수 있다. 이미 나에게 Otro buen día를 선물하며 '기회의 아이콘'이 되었다. 외국어는 내 인생에 계속 등장한다. 선물처럼. 또 어떤 길로 데려가 줄지 기대 된다.


"La vida es un regalo. El idioma también es un regalo."

(인생은 선물이다. 언어도 선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 보고 ‘토종’이라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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