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절대 할 수 없어요.”
석사 졸업을 앞두고 논문 지도교수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드렸더니, K교수님은 어설픈 위로 대신 단답형 ‘No’를 날려주셨다.
“국제통상법은 대부분은 변호사나 판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공부하는 학문이에요. 그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를 더 키우기 위해서 도전하는 분야라는 뜻이에요. 학생은 학문도 부족하고, 지금 시작한들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교수님 말씀대로면 애초에 책상 앞에 엉덩이 딱 붙이고 사법고시를 준비했어야 했나. 생각의 흐름대로 살다 보니 영어 좀 공부하고 있었고, 이왕 영어 공부한 김에 영국도 한번 가보고 싶었고, ‘국제학대학원’에 외국인 친구들이 많다고 하니 같이 껴서 공부하고 싶었을 뿐이다. 여기에 오면 국제기구 취직 정도는 꿈꿔볼 수 있을까 해서.
2년 전 입학할 당시(2009년) 우리 학교는 10명 중 3명이 외국인 학생이었고,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다. 대화 몇 마디 할 수 있는 나에게 국제 정세에 관한 토론을 하라고 했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이후로 내면의 밑바닥을 수백 번 목격하게 되는 극기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하루는 수업 시간 내내 교수님의 입과 칠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없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에게 교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주말에 근처 산에 한번 다녀와.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하나 찍어오고.”
아, 예. 이게 숙제라면, 논문 읽어오기보다는 훨씬 쉽네요. 기꺼이요 교수님.
산에 다녀오면 동기부여가 될까. 산 정상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거기엔 드라마틱한 깨달음도 정답도 없었다.
‘에라이. 넌 그냥 존버나 해라.’
터덜터덜 내려오며 내린 결론이었다.
학교 커뮤니티에서 나와 친구들을 종종 ‘토종’이라고 했다. 학교 주류였던 외국인 학생들, 부모님이 한국인인 이민 2-3세 학생들, 그리고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과는 다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들.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두지 않았지만 내가 만들었을지 모르는 그 큰 벽 앞에서 종종 좌절을 맛보았다. 성격의 문제일지도, 아니면 단순히 지식의 부족일지도 모르겠다.
우선 표현에 앞서 부끄러웠다. 입을 떼기 전에 수많은 자기 검열에 시간을 허비했고, 여기에 지쳐서 어느새 입도 닫기 시작했다. 점점 조용해졌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가장 냉혹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조금씩 깨닫게 되는 나의 정체성. 영어를 좋아하고 외국인 보는 것을 좋아하기에 내 세상은 한국 밖에 있을줄 알았는데, 세상은 복잡하고 나는 여전히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만들어낸 참혹한 자기 파악 오류였던 것이다. 이제서야 두려움이 몰려온다. 진짜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곧 서른인데 인생에 대한 책임과 의무 정도는 지고 살아야지. 이렇게 계획 없이 여기까지 왔네. ‘이제 뭐 먹고살래?’ 한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흔히 ‘취업전선’에 뛰어든다고들 한다. 정말 부리나케 뛰어들어 인턴십, 자격증, 토익점수, 취직에 도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어디든지 합격하는 곳으로 들어가자. 고민할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없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아니. 늦었다. 철저하게 늦었다. 불러주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아니라고 한다.
교수님에게 논문을 거절당한 일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눈물 나는 28살 시린 겨울이 이제서야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