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되고, 노마드적 삶도 살고
<바닷가 아틀리에>를 읽고
<바닷가 아틀리에>는 호리카와 리마코 작가가 쓰고, 그린,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을 읽는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림 보는 재미죠. 그림책 속 그림을 음미하면서, 마치 숨은 그림을 찾 듯, 작가가 그림 속에 심어 놓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찾아 그 의미들을 짐작해 봅니다. 때로 나의 상상과 나의 억지 해석을 갖다 붙이기도 하면서 말이죠. 후훗.
이 책 <바닷가 아틀리에>는 그림책 읽기 모임에서 선정한 도서라서 시간 관계상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 갔더니, 이 책, 유아방 한켠에 꽂혀 있네요. '아, 유아들 그림책으로 분류했구나.' 유아 수준의 내용이거나, 그림이거나, 그래야 유아방에 있을 자격이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 책을 그냥 쓰윽~ 가볍게 훑어보았습니다. 처음에 그랬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닌 겁니다. 그냥 한 번 쓰윽 읽고 보기에 그 안에 내용이 심오합니다. 도저히 유아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경지의 그림책인데, 이 유아들 어쩌면 좋을까요? 유아들에게 건네주거나, 읽어주어도, 내용 파악은 오리무중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는 다시 책을 꼼꼼히 봅니다.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봅니다.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인상적인 장면이 몇 군데 있는데,
처음에 저는 아이의 시선에서, 즉 그림책 속 소녀의 입장에서 그림을 읽었습니다. 어두운 배경 속의 어린 소녀가 비눗방울을 불며 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뒤쪽 배경에 집안에 있는 엄마인 듯 보이는 여자가 전화를 하며 서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엄마 친구의 초대를 받아 바닷가 아틀리에로 가고, 거기서 일주일을 보냅니다. 일주일을 보냈던 아틀리에에서의 마지막 밤, 송별회를 하며 이 소녀는 화가에게 말합니다. 아틀리에에서 보낸 일주일은 최고의 하루하루였다고.
그림책을 펼치고 처음 읽었을 때는 어린 소녀가 보였는데, 두 번째 읽을 때는 그림책 속의 두 번째 주인공, 화가가 보입니다. 엄마의 친구이면서 바닷가 아틀리에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살고 있는 분이죠.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요리를 장 봐온 재료들로 만들어 식탁에 올리고, 그래서 세상에 딱 하나뿐인 요리를 하고, 아침이면 저 멀리 오션뷰를 감상하며 물구나무서기로 건강도 챙기고, 작품 활동을 할 뿐인데도, 바닷가 아틀리에에 둥지를 틀고, 그림 같은 집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며 누구에게도 신경 안 쓰고, 독립적인 자기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 모습은 제가 오래전부터 동경해 온 삶입니다. 오로지 작품 활동을 해서 생계가 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거겠죠. 차도 있고, 집도 있고, 작품 활동과 같은 자기 일이 있어 생계도 가능한 노마드적 삶. 물론 그림책 속에서 구현한 삶이고 실제 삶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저는 이분의 삶이 너무 부러운 겁니다. 미치도록 살고 싶은 그런 삶입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에게, 혹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선물 같은 일주일을 선사하며 영향력을 주는 어른, 그런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림책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들었다가 '이게 웬일!' 덜컥, 큰 숙제만 생겼습니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숙제와 '오션뷰 아틀리에 마련'이라는 숙제입니다. 하하하
뒤늦게 말하지만 사실 책 속의 이 소녀, 이런저런 안 좋은 일로 학교도 안 가고 방학이 되었지만 그냥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이 소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그저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자기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얻게 하는 것으로, 어린 소녀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어린 소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책 속에 나오지 않습니다. 바닷가 아틀리에 화가의 집에서 보내는 일주일 동안, 거실 책상에 꽂혀 있던 책들, 특히 외국어 책들을 보며, 영어에 대한 관심과 외국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부라서 뭔가 그쪽일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어쨌든, 소녀가 바닷가 아틀리에에서 일주일을 보낸 고 난 후의 모든 시간은 그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제 할머니가 되어 손녀와 마주 앉아 그때 그 시절 그곳에서 그렸던 그림을 매개로 그때를 추억할 뿐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손녀에게까지 전해지는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 그런 추억 하나 제게도 있었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누군가에게 이런 의미 있는 추억, 전해주는 그런 어른이고 싶습니다.
공공 도서관 유아방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어른이 꺼내어 읽고, 어른이 더 감동받은 <바닷가 아틀리에>, 추억이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면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