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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홈 Jan 03. 2020

작아도 괜찮은 이유

물건의 크기, 마음의 크기

새 냉장고와 세탁기가 도착했다. 한국 제품을 샀다고 집주인은 아주 생색을 제대로 냈다. 나는 한국 제품을 원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쓸만한 물건'이면 된다.  첫 1년 동안 집주인은 거액의 월세를 받고도 세입자가 들어와 살 수 있는 편의는 그다지 봐주지 않았다. 4년째 빈집에 방치되었던 오래된 세탁기는 처음부터 새것이 아닌 듯했다. 그 녀석은 빨래를 돌리면서 나 지금 돌고 있음을 아주 요란스럽게 알려주곤 했다. '저러다가 저 세탁기가 펑! 하고 터지는 건 아닐까?' 무서운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드는 세탁기가 만들어 내는 굉음은 늘 언제나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이제 곧 산산조각으로 해체될 것 같은 불길함을 안겨주면서 세차게 돌아갔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세탁기 내부 벽에 단단히 박혀 있어야 할 빨래 거름망이 슬그머니 빠져나와 통 속의 다른 빨래들과 같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거름망없이 돌아가는 세탁기는 영 찝찝했다. 재 계약을 위해 집주인이 방문했을 때 나는 감춰두었던 내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대만 아니었을 뿐 나는 거의 배우 저리 가라는 수준으로 멋진 연기를 선사했던 것이다. 세탁기의 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목소리 톤은 '솔'을 유지하면서, 손과 몸통, 표정까지 삼박자가 적절히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 내는 나의 제스처는 모두의 귀를 쫑듯 세우며 경청하게 만들었고, 이게 무대였다면 기립 박수를 받을 만큼 실망스럽지 않은 원맨쇼를 보여주었다. 세탁기가 돌고 있는 상황을 두 팔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우리 가족 포함, 집주인 부부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고, 결국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었다. 내용은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했지만 표현은 아주 리얼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꼭 쓸만한 세탁기여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모습은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문제는 냉장고였다. 새로 사서 보내주겠다고 한 약속을 애써 지키는 척만 하려는 건까? 사진으로 보내온 냉장고는 4인 가족이 쓰기에 상당히 작아 보였다. 이미 기존 냉장고에 대한 묘사는 끝났다. 냄새나고 녹슨 냉장고의 비위생적이고, 불쾌한 상황에 대해서는 나의 원맨쇼로 충분히 표현했었다. 바꾸어 주려면 동일 사이즈여야 했다. 어쩔 것인가! 더 요구할 것인가, 접을 것인가. 나는 길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장황해지는 게 싫다. 왈가왈부하다가 서로 불쾌해져서 원하는 것 얻지 못하고 감정만 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충분히 설명했고, 상대가 납득했고, 그런데도 그 정도밖에 못한다면 그건 그 사람 됨됨이다. 그래서 딱 한번 더 말했다. 


"4인 가족이 쓰기에 냉장고가 작아 보입니다. "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 맞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것보다 작습니다. 우리 예산이 그것밖에 안됩니다. 너무 작다면 기존에 사용하던 것을 계속 쓰셔야 합니다."


냉장고를 안 사주겠다는 심산인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답변을 받고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알았다. 이제 내가 오케이 해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멈칫했던 순간, 오케이를 하게 만든 내 안에 소리는 바로 '나는 미니멀리스트'였다. 나는 지금 미니멀리스트라는 라이프 스타일 추구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두 달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미니멀리즘 연습해 왔다. 비우는 것에도 일각 연이 있다. 그러니 작은 냉장고여도 문제없다. 작으면 작은 대로 나는 살아낼 힘이 있다. 15평 작은 집에서도 살았고, 한 명 자취할 정도의 작은 주방에서도 4년 동안 살림을 했었다. 냉장고가 작은 것은 문제가 안된다. 작아도 괜찮다. 오히려 물건을 줄이는 연습을 할 좋은 기회다. 큰 냉장고 속 물건을 줄여 작은 냉장고로 옮기면 된다. 그러나 비위생적이고 찝찝한 냉장고는 당장 내보내야 할 1순위 물건이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작아도 괜찮아. 나는 미니멀리스트야.' 내 마음의 소리를 먼저 듣고, 주인에게 답변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작은 냉장고로 어떻게든 살아보겠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작은 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을 보고 안도감이 올라온다. 커도 좋다. 작아도 좋다. 냉장고의 크기는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크든 작든 그것에 맞게 살아내면 된다. 냉장고 크기보다 내 마음의 크기가 어느새 성큼 자란 것을 보는 게 더 흐뭇하다. 물론 새 냉장고와 새 세탁기도 마음에 든다. 


'1년 동안 부서지기 직전까지 온몸으로 살아 낸 세탁기야, 그리고 수명이 다한 냉장고야 잘 가, 그동안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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