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지쳐서 독일 여행을 떠났다.
Friends의 캐릭터 중 모니카를 좋아한다. 프렌즈 6명의 중심에는 모니카가 있다. 모니카가 레이첼과 함께 살기 전 피비는 그의 전 룸메였고, 레이첼은 모니카의 고등학교 친구이며 모니카의 오빠 로스는 대학 친구인 챈들러를 이들에게 소개를 하고, 챈들러가 룸메 조이를 이 그룹에 소개를 하게 되면서이 6명은 뉴욕 한가운데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끈끈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내 친구 E는 모니카 같은 존재다. 베를린 자유대에서 만났을 때 이 친구는 당시 30살이었고, 드레스덴에서 공대 공부를 하다 한국 문화가 좋아 공대를 때려치고 한국학과로 새로운 시작을 했다. 첫만남부터 텐션이 높았던 친구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낯가리는 내가 친해질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그녀가 먼저 다가왔고 그렇게 우리는 종종 베를린의 한국 음식점을 돌아다니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철 독일에 머무르는 교환학생이었기에 그 친구와 오랜 기간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을까 했지만, 한국과 독일을 서로 좋아한다는 공통점 아래에 우리는 느슨하게나마 연락을 이어갔다. 코로나가 풀려갈 즈음 E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E는 6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 놀러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E는 A와 함께 한국에 놀러왔고 반가운 얼굴들도 있는가 하면, 새로운 얼굴들도 있었다. 모두 E의 친구로 시작해서, 서로 데면데면 알음알음 알았던 뮤추얼들이 어느새 찐친이 되었다고 한다.
그중 한명은 T라는 친구였다. T는 E의 드레스덴 공대 시절 친구였다고 했다. 드레스덴에서 만나 함께 20대 초반을 보냈는데, 서로 바빠서 잘 못 보다가 둘 다 삶의 터전을 베를린에 뿌리내리면서부터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T도 한국의 문화에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하면서, E의 한국학과 친구인 A와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그들만의 프렌즈를 베를린에서 찍고 있었다. T와는 서울에서 처음 만났지만서도 우리는 베를린에서 다시 만나기로 기약했다.
일요일 베를린 마우어파크에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베를린 장벽이 가로질렀던 공간은 너도나도 모일 수 있는 공공의 장소가 되었고, 일요일 아침만 되면 베를린의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E의 집에서 지내고 있던 나는 일요일 벼룩시장을 다시 가보고 싶다고 얘기했고, 마침 T의 친구들이 그 근처에서 벼룩시장 부스로 참가를 한다기에 우리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Bernauer Straße(베르나우어 슈트라쎼) 에 도착했다. 단조로운 색의 옷을 입기로 유명한 독일인들 사이에서 샛노란 옷을 입고 나온 T는 힙한 베를리너의 표본이었다. 마우어파크에 입성하기 전 T가 여기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벼룩시장의 참맛이 안 난다며, Arkonaplatz(아코나플라츠)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 가자고 제안했다. 사용감이 있는 수많은 물건 중에서 나와 핏(fit)이 맞는 스토리를 가진 물건을 찾는 것이 벼룩시장의 맛인데, 마우어파크의 벼룩시장은 자본이 잠식한 공간이라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더 이상 벼룩시장의 본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우어파크 벼룩시장에 잠깐 머물고 아코나플라츠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베를린 곳곳의 집구석에만 숨겨져있던 이야기들이 펼쳐진 공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손녀가 더 이상 장난감을 사용하지 않는다며 장난감을 팔러 나왔고, 오래 사용하던 악세서리를 판매하는 부스도 있었다. 마우어파크보다 10배나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우리는 T의 친구가 운영하는 부스에 갔다. E와 T는 이 친구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다 만나보니 한국문화를 좋아하고 한국 여행을 그리워한다는 공통점을 가져 급속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이 친구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값싸지만 기분 낼 수 있는 간식들을 수채화로 그림을 그려 팔고 있었다. 빙그레 바나나 우유와 마이구미, 그리고 참이슬 소주까지 편의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그녀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다같이 아코나플라츠에서 베를린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한 베를리너린의 푸드트럭에서 투박하지만 담백한 베를리너들의 간식 커리부어스트를 먹으면서 맥주를 기울이고 일요일 오전을 보냈다.
프렌즈의 친구들은 고향이 아닌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정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6명이 공유한 공동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E도, T도, 고향이 아닌 베를린에서 매일 새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을 점점 만들어 나가면서 도시에 뿌리를 내렸던 거다. 그리고 나처럼 독일을 좋아하는 한국 친구들과 연락을 지속하여 지구 반바퀴 돌아 한국 8도와도 연결이 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느슨한 고리로 연결된 우리는 공통의 관심사로 묶여 있다. 공통의 관심사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며 응원한다. 매일 소소하게 연락을 주고 받진 않지만, 한 번 연락할 때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며 우린 그렇게 끈을 유지한다. 모든 관계의 중심인 모니카처럼, E는 베를린 한가운데서 서울과 베를린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