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지쳐서 독일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서 베를린으로 곧바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없어 프랑크푸르트에 하루 머무른 후, 베를린으로 떠났야 했다.
그리던 베를린으로 떠나던 날, 비행기 출발 2시간 전 내가 예약해둔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착되거나 가끔 이유없이 취소되는 이곳 독일에 온 것을 체감하며 공항에서 친구들에게 예정시간보다 늦게 갈 것 같다고 연락을 돌렸다.
다행히도 그날 베를린에 가는 비행기를 새로 예약할 수 있었는데, 8시 도착 비행기였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던 베를린 자유대 친구 A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 주말에 시간 되면 만나서 밥을 먹자고 말을 하며 오늘의 연착 사실을 알렸다. 8시에 도착하는 비행기니 시내에서 만나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그 다음날 출근을 하고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는 만남을 제안하기에 미안한 시간대였다. 저녁에 약속되어 있던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미니 옥토버페스트 가판대에 앉아 맥주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주린 배를 달래며 시간을 때웠다.
4년만에 만난다. 언제나 먼저 만나자며 손을 내밀어주던 친구들이었다. A는 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인턴을 하던 때에도 만나자며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가서 또다시 처음부터 적응르 해나가야 했을 때, 베를린과 교류가 뜸해지며 외로웠다. A는 근교 도시 다름슈타트에서 왔는데, 부활절 기간에 본가로 초대해주어 1박 2일 동안 그녀의 가족과 친구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영어를 못하시는 가족 분들도 있어 100% 독일어로만 의사소통하느라 열심히 머리에 담긴 모든 독일어 단어를 꺼내며 교류했던 기억이 난다.
간만에 만나는 친구였기에 그날 저녁을 같이 먹고, 주말에 한 번 더 보면서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지만 야속한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아쉬움을 안고 숙소에 들어갔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 때쯤, "뭐해?"라는 메시지가 왔다. 도착시간에 맞춰 친구들은 내가 예약해 둔 숙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나는 체크인하자마자 꼬질꼬질한 모습 그대로 친구들을 만나러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친구들은 서베를린의 Charlottenburg (샤를로텐부르크) 지역의 Sophie-Charlotte-Platz (소피샤를로테 플라츠)역 근처 카페에서 팬케이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샤를로텐부르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힙스터 베를린과는 다른 매력의 동네다. 집값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싸지만, 나이대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조용한 동네다. 여행지보다는 진짜 도시로서의 베를린 모습을 볼 수 있는 구역인데, 몇 년 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지역의 평균 나이는 58.8세에서 54.8세로 젊어졌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시내 중심과 가까운 지역이라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카페가 마감하기 직전까지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게 베를린에 다시 모인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떠들었다. 오랜 친구를 간만에 만났을 때의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며 근래에 느꼈던 감정 중 가장 충만하고 기뻤던 날이다. 따스한 행복감이었다.
코로나가 전세계를 뒤덮은 직후의 시간들에서부터 코로나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상을 되찾은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며, 가장 기뻤던 일은 A가 커리어를 쌓음과 동시에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의 시간 동안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있어 수동적인 태도로 변해 있었다. 앞으로의 삶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 고마운 기회로 여러 소개팅에 나갔다. 거의 한달에 2번꼴으로 나간 셈인데, 수많은 자리에서 가짜 웃음을 짓고 면접관 앞에 앉은 지원자마냥 기계적으로 외워둔 자기소개를 했었다.
언제나 타이밍이 문제다. 상대방이 나를 마음에 든다고 하면 나는 그닥 관심이 가지 않았었고, 내가 상대방이 좋다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케이스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절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이런 고민은 현실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꺼내지 못했던 고민들이었고, 문화가 다른 외국인 친구 앞에 털어놓는 것은 묘하게 자기 고백, 자아 성찰의 시간으로 느껴져 A에게 이 고민을 털어놨다.
말을 나눠보니 그녀는 4년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며 단단한 사람으로 변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경험이 많은 위안이 되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타지인 베를린에서 외로웠던 그녀는 남자친구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데이팅 앱을 깔아 수많은 데이트에 나갔다고 한다. 참고로 독일의 데이팅 문화는 코로나 기간 동안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자만추를 선호하던 독일인들은 자연스럽게 파티나 공간에서 만나는 소셜라이징이 불가능해지니 데이팅 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아무튼 데이팅 앱에서 만난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베를린 운터덴린덴에서부터 슈프레 강까지의 동네를 산책하면서 데이팅하는 2시간 동안 자기 자랑을 줄곧 하던 남자,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 대화에는 집중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해하던 남자, 등등을 거치면서 왜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이랑 꼬이는 걸까 자존감이 폭삭 주저앉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싶었지만, 오히려 외로움이 더 깊어지는 꼴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자아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자신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고 한다. 사소한 예시로, 나한테 맞는 색깔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머리색을 분홍, 파랑, 보라색으로 염색하기도 했단다. 고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 둔 후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단단한 삶을 살 수 있다.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서 쇼펜하우어는 고독으로 두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자기 자신과 함께 할 시간을 얻고, 둘째 타인과 함께하지 않을 자유를 얻는다. 어쭙잖은 사람과 어울리며 타인의 기준에 맞춰 내 시간을 사용하는 것보다, 홀로 고독한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고독의 시간이다.
24시간을 홀로 보내라고 한다면, 외로움에 고통 받는 시간이 있기도 하다. 카톡창을 열어보았는데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온 연락은 0개라 인스타그램을 들어갔더니 모두가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과 번개 약속을 잡아 적적함을 달랬던 순간들이 있었다. 고독의 시간을 지나야 쇼펜하우어가 말한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책을 백날천날 많이 읽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 사람이라고 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자기만의 명확한 근거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A의 이야기는 어쩌면 전해 내려오는 도시의 전설처럼 느껴질 수 있다. 삶을 네 중심에 두면 세상이 네게 두 팔 벌려 다가올거야 와 같은 전래동화 식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4년만에 만난 친구가 진심 어리게 귀담아 듣고 얘기해준 조언이기 때문에 더 와닿았던 걸까, 이번에는 이 이야기가 전래동화에서 현실에 있을 법한 에세이로 변신했다. 외로움에서 도망치지 않고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할 거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