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지쳐서 독일 여행을 떠났다.
비엔나에 가게 된 이유는 오직 에곤 쉴레 하나 때문이다. 24살에 에곤 쉴레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풍성하게 색깔을 쓰는 화가들 사이에서 그의 작품만이 유독 눈에 띄었다. 소로, 르누아르, 모네풍의 아름다운 그림들 사이에서 삐딱한 시선의 날카로운 사람들의 그림이 있었고 이 그림은 에곤 쉴레의 그림이었다. 섬뜩한 그림체를 보고 억하고 소리를 질렀는데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저 그림은 무엇일까 궁금했었던 이 화가는 지금껏 내 마음속에 첫번째 순위로 자리잡은 화가다.
에곤 쉴레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비엔나에 갔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 세상이 파괴와 창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구심점에 있을 때, 비엔나는 예술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는 변화의 구심점에 있었지만, 시대가 원하는 요구를 응하지 못하고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는 모순적인 공간이었다. 예의와 규범을 강조했지만, 도시를 깊이 들여다보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한 가운데서 에곤 쉴레는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2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그는 생전에 35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18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가정하면, 10년 동안 그는 1년에 350개의 작품을 만들어낸 거고, 하루에 약 1점씩 그림을 그려낸 거니 하루종일 화실에 본인을 가둬놓고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숫자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면 하루에 하나씩 그려냈을까.
20세기 초반 클림트가 오스트리아 빈을 주름잡는 화가였는데, 에곤 쉴레는 그의 제자였다. 이름을 날리고자 했더라면 유명한 스승의 화풍을 따라갈 법도 한데, 클림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클림트는 화려한 색을 이용해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표현한 반면, 에곤 쉴레는 붓끝으로 인간의 모습을 거칠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인간 실존에 대해 고뇌하며 죽음을 표현해냈다. 긴 직선의 양끝에 대척지점에 놓여있던 그 둘은 인간 실존이라는 개념으로 데칼코마니처럼 만난다.
이렇게 쉴레는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마음껏 표현해냈다.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의견을 거침없이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스승인 클림트보다 제자인 쉴레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의 작품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에 가서 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떠났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생각들을 표현하기 어려워서 답답한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 거칠고 솔직하게 표현한 쉴레의 그림들을 보면서 묵을 감정들을 해소하곤 했다.
그의 작품들은 쉴레의 생애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삐딱하게 곁눈질하며 정면을 바라보는 가장 유명한 그의 <자화상>은 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여인 <Wally, 발리> 옆에 놓여 있었다. 살아있을 때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죽어서 그 둘이 같이 관객들을 바라본다는 것이 쉴레의 팬으로서 내심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죽어서는 편히 있겠구나 생각하며.
쇼펜하우어는 삶은 곧 고통이며, 예술은 삶의 고통을 잊게 한다고 말했다. 예술이 “안개를 걷어낸다"고 말하는데 개별성이라는 환상이 사라지고 우리는 인식과 인식의 주체를 분리하지 못하고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술이 우리를 치유해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쉴레의 그림들은 날카롭고 외설적이라고 불리지만, 모순적으로 이 그림들을 통해 여러 감정을 해소하고 치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