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시대의 기병 흉갑은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어떤 흉갑도 앵발리드 제1제국관의 유리장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이 갑옷만큼 강렬한 인상은 남기지 못할 것이다. 황동과 철판으로 만들어진 약 6.9kg 무게의 이 흉갑은 포탄에 관통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4파운드포로 추정되는 포탄은 착용자의 오른쪽 가슴을 뚫고 들어와 흉곽과 날개뼈를 박살내면서 빠져나갔다. 착용자는 정면돌격 중에 포탄에 맞았고, 아마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해당 흉갑에서는 유실된 상태지만, 원래 기병들의 흉갑 내부에는 천이 누벼져 있었고 작은 안주머니도 달려 있었다. 병사들은 보통 그 안주머니에 신분증명서나 휴가증 같은 중요한 서류와 비상금을 넣고 다녔다. 이 흉갑 착용자의 신원도 그 덕분에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워털루 전투(Bataille de Waterloo) 당시 제12기병사단 예하 제2총기병연대 소속이었던 프랑수아 앙투안 포보(François Antoine Fauveau)였다.
1792년 1월 18일 태어난 포보는 입대하기 전까지 가업을 이어받아 버터를 만들어 팔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의 입대 서류는 이 청년의 생김새를 꽤나 자세하게 말해 주고 있다 : "키 179cm, 얼굴이 긴 편, 푸른 눈, 매부리코, 작은 입, 엉덩이턱, 갈색 머리와 눈썹, 주근깨가 많음." [당시에는 증명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서류에는 사진 대용으로 얼굴의 특징을 자세히 기록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꽤나 컸던 키를 제외하면 별로 두드러지는 모습은 없어 보였던 포보는 1815년 5월 21일 징집되어 제2총기병연대 4대대 4중대에 배치되었다.
6월 18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제2총기병연대는 제12기병사단 1여단에 소속되어 워털루의 전장으로 향했다. 1여단은 미셸 네(Michel Ney) 원수가 언덕 뒤의 영국군 보병방진을 향해 돌격을 명령했을 때 동원되었다. 1여단 총원의 약 50%가 이 돌격에서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불행한 포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포탄에 직격당했고,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23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쳤다.
그는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전장 어딘가에 묻혔다. 이 청년의 시체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으나 그의 흉갑은 달랐다. 전투가 끝난 뒤 돈 될 만한 것을 찾아 시체 사이를 뒤지고 다니던 농부들이 그의 흉갑을 파내어 가져갔다. 그런데 워낙 충격적으로(?) 파괴된 터라 이 갑옷은 곧 수집가들의 흥미를 끌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이 흉갑을 소장했던 사람은 필리프 리슈텐슈타인(Philippe Lichtenstein) 대령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의 군사 유물들을 수집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인상적인 흉갑을 보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2년, 그가 자신의 콜렉션을 국가에 기증했을 때 포보의 흉갑도 앵발리드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포보가 전사하고 난 이후 그의 고향 일대에서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 하나가 떠돌았다. 당시 징집 당사자였던 포보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닮은 남동생들 중 한 명이 포보인 척 하고 대신 입대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저 흉갑을 껴입은 채 워털루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청년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