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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토 Nov 29. 2021

Merci, j'ai fait mon devoir..

1806년 4월 22일 빌뇌브 제독의 죽음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


1806년 4월 22일 오후, 피에르 샤를 실베스트르 드 빌뇌브[Pierre Charles Silvestre de Villeneuve] 제독은 렌(Rennes)의 풀롱 가 21번지, 한 작은 호텔의 2층 5호 객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17일부터 하인 한 사람과 함께 이 호텔에 투숙 중이었지만 시내 외출은커녕 방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이 두려웠던 탓이다.


빌뇌브는 1805년 10월 21일, 그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총지휘했다. 그러나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Horation Nelson] 제독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 주며 참패했고 영국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풀려나 막 프랑스로 귀국한 참이었다. 승자인 넬슨과 에스파냐 함대 측 사령관 페데리코 카를로스 그라비나[Federico Carlos Gravina] 제독을 비롯하여 약 3,700명이 전사한 이 치열한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큰 부상 하나 없이 멀쩡하게 돌아온 그를 나폴레옹 황제도 프랑스인들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빌뇌브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뷔생토르 호 (빌뇌브의 기함)

빌뇌브는 몇 년 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 해전에서 프랑수아 폴 드 브뤼에[François Paul de Brueys d'Aigalliers]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했을 때였다. 빌뇌브는 아부키르에서도 운 좋게 전열의 후미 쪽에 있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트라팔가르에서 두 번째로 생환한 지금, 그는 '명예롭게' 전사한 브뤼에나 그라비나보다 훨씬 더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전사의 에토스와 수병은 바다에서 죽는다는 로망이 아직 사회 전반에서 힘을 발휘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싸우다 기함과 운명을 같이한 제독에게 보다 관대했다.


브뤼에는 죽기 전 갑판 아래로 치료받으러 내려가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프랑스 제독에겐 자신의 자리에서 죽어야 할 의무가 있다 (Un amiral francais se doit de mourir sur son banc de quart)." 그의 적 넬슨 또한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어쩌면 그들의 유언이 옳았던 걸까? 프랑스 제독 빌뇌브는 뷔생토르 호의 갑판에서 죽음으로써 의무를 다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영국에서의 포로 생활부터가 빌뇌브에게는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빌뇌브를 지켜본 영국인들은 그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영국에 억류되어 있던 시기, 빌뇌브는 그의 전우이자 해군부 장관인 드니 드크레[Denis Decrès] 제독에게 '트라팔가르의 패전에 막중한 책임을 느껴 매우 고통스러우며, 가능한 한 빨리 황제 폐하께 가서 내가 한 일들을 해명하거나 내 경솔함과 부족한 통찰력에 대한 처벌을 받길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래도 이 때까지는 그에게 현직에 복귀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에 도착하자 걱정과 공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폴레옹은 빌뇌브에게 파리로 올 생각은 하지도 말고 프로방스의 자택으로 내려가 근신하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그 이후엔 군사재판에 회부될 테고, 좌천을 넘어서 징역살이나 불명예 전역, 최악의 경우 총살이라는 중형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고 몇천 명을 바다에 수장시킨 졸장, 영국 함대만 보면 벌벌 떠는 우유부단한 겁쟁이라 수군거리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안한 상상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빌뇌브는 결국 바깥 세상을 피해 방구석에 틀어박혀 버린 것이다.


피에르 샤를 실베스트르 드 빌뇌브

어쨌든, 다시 4월 22일로 돌아가 보자. 빌뇌브는 여느 때처럼 방에서 두문불출했고, 그의 하인 바케[Bacqué]는 밖에서 몇 가지 볼일을 본 뒤 산책을 하다가 5시쯤 호텔로 돌아왔다. 바케는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기 위해 제독의 방문을 두드렸다. 답은 없었다. 주무시나?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러 간 그는 저녁때쯤 다시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하인은 조금 당황했다. 웬일로 어딜 나가셨나? 카운터로 내려갔지만 빌뇌브가 나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기에, 바케는 주인장을 데리고 제독의 방으로 향했다. 혹시 안이 보이려나 해서 열쇠구멍 쪽에 등불을 비춰 본 호텔 주인은 방 안에서 열쇠구멍에 열쇠가 꽂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던 간에 제독이 자의로 외출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여벌 키로 문을 딸 수 없다는 것도.


글쎄... 빌뇌브가 그냥 노크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다면 좋겠지만, 하인도 호텔 주인도 영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빌뇌브는 오랜 해상 생활로 건강이 나빴기에 바케는 제독이 급성 심장마비나 뇌졸중을 일으킨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은 괜히 문을 부쉈다가 이상한 누명을 쓰고 싶지는 않아서 경찰을 불렀다. 열쇠공과 함께 도착한 두 명의 경찰은 몇 번 더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자 열쇠공을 시켜 문고리를 뜯었다.


황당하게도 객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쳐들어와서 빌뇌브를 납치했다기엔 침대 위의 침구 및 방 안의 가구나 물건들이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상태였고, 빌뇌브가 스스로 잠적했다기엔 돈이 든 지갑과 각종 중요한 서류들이 그대로 있었다. 어리둥절한 경찰들은 방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 경찰이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빌뇌브가 사망한 호텔이 있었던 렌의 풀롱 가(현재 이름은 르바스타르 가). 호텔 건물은 사라진 듯하다.

빌뇌브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천장을 보고 타일 바닥 위에 반듯하게 쓰러진 채로. 흰색 셔츠와 조끼, 푸른색 바지를 입고 가죽 부츠를 신은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희한하게도 조끼 안에 받쳐 입은 셔츠가 허리까지 완전히 벗겨져 있었으며, 그의 왼쪽 가슴에는 테이블 나이프가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숙히 박혀 있었다.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로 시체 주변은 피범벅이었다. 


경찰들은 급히 부검의를 불렀다. 빌뇌브가 사망한 지는 이미 몇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였으며, 가슴에는 6군데의 자창이 있었는데 그 중 심장을 찌른 마지막 일격이 치명상이었다. 사망자가 장성급 장교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즉시 경찰장관 조제프 푸셰[Joseph Fouche]와 해군장관 드크레, 그리고 수석헌병총감 봉 아드리앙 자노 드 몽세[Bon Adrien Jannot de Moncey] 원수에게 보고되었다. 수사를 총괄한 푸셰는 빌뇌브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외부인이 객실에 침입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고, 빌뇌브의 짐 속에서 평소라면 그가 읽을 일이 전혀 없을 인체 가슴 부분의 해부도 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빌뇌브가 사망 전날 아내에게 쓴 편지는 그의 절망적인 심정과 자살 계획을 명확하게 알려 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사랑하는 여보,

당신이 이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 자신보다는 당신이 생각나서 더 슬펐어. 다 끝난 거겠지, 삶이 곧 치욕이요 죽음이 곧 의무인 상황에까지 와 버렸네. 이곳에 혼자 남아서 황제 폐하의 비난에 놀라고, 내 친우였던 (해군) 장관에게 냉대받고, 스스로 초래한 재앙의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나는 운명이 나를 이끄는 바와 같이, 죽어야만 할 거야.

이런 행동에 대한 어떤 변명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알아...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해야 돼, 극심한 좌절감이 나를 휩쓸고 있어. 당신이 좋아하는 종교 활동이 주는 평온한 감정으로부터 위안을 찾았으면 좋겠어.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안식을, 당신이 (신으로부터) 찾는 게 내 소원이야. 안녕, 우리 가족들 그리고 내가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길. 이젠 끝냈으면 해,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어.

내게 이 끔찍한 유산을, 내 오명의 무게를 물려받을 아이가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 나도 이런 운명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었는데. 이런 삶을 살길 원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내 뜻과는 상관 없이 이런 결말에 도달하게 되다니...


드크레와 몽세는 빌뇌브가 자살했다는 결론에 동의했다. 푸셰의 조사 결과는 공식 보고서로 작성되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곧 빌뇌브가 나폴레옹의 지시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부분은 '테이블 나이프'와 '6군데의 자창'이었다. 테이블 나이프로 자기 가슴을 6번 찌르는 게 가능한가? 물론 자살자에게 주저손상이 여러 군데 있는 건 흔한 일이고 죽을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 무엇이 불가능하겠냐마는, 권총이나 검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는데 그런 무기를 쓰지 않고 왜 굳이 테이블 나이프를 쓴단 말인가. 영국 언론들 또한 '빌뇌브 제독은 진짜 자살했나? 아니면 프랑스 당국에 의해 자살당했나?' 라는 뉘앙스로 사건을 보도하며 나폴레옹을 조롱했다.


렌의 생제르맹 성당

빌뇌브가 자살했냐 아니면 암살당했냐 하는 의혹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그의 장례식이 렌의 생제르맹 성당에서 제독 계급에 걸맞는 예우와 함께 치러졌다. 일단 땅에 묻히고 나자 빌뇌브의 죽음은 빠르게 퍼져 나간 소문만큼이나 빠르게 잊혔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프랑스인들에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다. 빌뇌브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쯤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주제로 옮겨 갔다. 트라팔가르에서 커리어를 통째로 말아먹은 불행한 제독의 죽음 외에도 떠들 만한 이야깃거리는 넘치도록 많았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인트헬레나로 쫓겨나 죽은 나폴레옹의 첫 번째 주치의를 맡았었던 배리 오메아라[Barry O'Meara]가 이 해에 세인트헬레나 섬 생활을 기록한 회고록을 출판했다. 오메아라의 회고록은 뜻밖에도 호사가들 사이에 빌뇌브 제독 암살 논쟁을 부활시켰다. 회고록에는 나폴레옹이 빌뇌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실려 있었는데, 이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공식 보고서 내용과 좀 달랐던 것이다.


(이하 나폴레옹의 발언을 오메아라가 옮겨 적은 것) 빌뇌브는 영국인들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부터 그가 당한 패배에 괴로워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네. 그는 심장을 그린 여러 점의 해부도 판화를 보면서 심장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 그림들을 제 가슴에 대 보곤 했다는 거야.

그가 프랑스로 귀환했을 때, 나는 그에게 파리로 오지 말고 렌에 처박혀 있으라고 명령했지. 그러자 그는 내 명령에 불복종하여 많은 함선을 잃은 죄로 군사법정에 서게 될까 봐 두려워했고, 자살함으로써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네. 그는 심장을 그린 판화들을 가져와서 다시 한 번 자기 가슴에 대어 보고, 그 그림 정가운데 큰 핀*을 꽂은 다음 자신의 가슴에서 (그림과 같은 심장의)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가까이 핀을 고정시키고, 핀을 끝까지 가슴에 찔러넣어 심장을 꿰뚫어서 죽었어.

사람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네. 핀이 그의 가슴에 박혀 있었고 가슴에 난 상처의 위치와 (그림에) 핀으로 찍혀 표시된 위치가 같았지.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재능이라곤 없었지만 용감한 사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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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은 핀(pin)인데 도대체 어떤 흉기인지 짐작이 안 가서 프랑스어 번역본을 봤습니다만 프랑스어판에도 핀(epingle)이라고 나오네요. 심장을 뚫을 정도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새의 핀은 아닌 것 같은데... 핀 형태로 생긴 송곳 같은 물건인가? 저도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던 부분만 묘하게 바뀌지 않았나? 테이블 나이프에서 핀(?)으로, 6개의 상처에서 1번의 일격으로. 세월이 꽤 흘렀으니 나폴레옹이 세세한 부분들을 잊어버린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가 사건 정황을 왜 저렇게 바꿔서 기억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1826년 뒤이어 출판된 로베르 기유마르[Robert Guillemard]의 회고록은 빌뇌브 암살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퇴역한 해군 부사관이라는 기유마르의 신분은 특별할 게 없어 보였으나 그가 풀어낸 모험담은 특별했다. 기유마르는 자신이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전함 르두타블 호의 승조원으로 탑승하여 넬슨 제독을 저격했고(?!), 영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빌뇌브 제독과 친분을 쌓게 되었으며, 프랑스로 돌아와 빌뇌브와 함께 렌에 머무르던 도중 빌뇌브가 살해당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기유마르의 회고록. 이거 사료로 쓰시면 안됩니다 ;ㅅ;

기유마르의 회고록은 영어와 독일어로도 번역되었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사실 자세히 뜯어보면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 많았지만,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술술 읽혔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 특히 영국인들 - 그가 넬슨을 쐈다는 이야기는 허풍으로 취급했다. (넬슨이 르두타블 호에서 날아온 총탄에 피격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난전 속에서 누가 넬슨을 맞췄는지 파악하기는 불가능했으리라) 그러나 빌뇌브의 암살 이야기는 그럴듯했다. 심지어 기유마르는 그가 목격한 5명의 괴한들 중 한 사람의 신원을 특정하기까지 했다. 범인으로 지목당한 사람은 놀랍게도 빌뇌브의 기함 뷔생토르 호의 함장이었던 장 자크 마장디[Jean Jacques Magendie]였다. 기유마르는 마장디가 해군장관 드크레 - 혹은 그 배후에 있을 독재자 나폴레옹 - 의 지시를 받아 빌뇌브를 암살했다고 썼다.


사건이 벌어진 지 근 20년이나 지나서 느닷없이 살인범으로 몰린 마장디는 펄쩍 뛰었다. 그는 기유마르의 회고록이 출판되기 한참 전인 1814년 옛 상관을 기리기 위해 빌뇌브에 대한 회고록을 먼저 낸 인물이었다. 마장디는 자신이 빌뇌브를 변호할 때 기유마르란 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제서야 회고록을 써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자신이 상관을 죽였다는 어떤 물증도 없다고 화를 냈다. 1820년 세상을 떠난 드크레는 자신에게 쏟아진 어떤 의혹에도 직접 해명할 수 없었지만 그의 부하들이 해군장관의 결백을 증언했다. 드크레는 빌뇌브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을 받은 나머지 곁방에 숨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비록 해군장관이 시기심과 출세욕으로 유명했을지라도, 친구의 죽음을 두고 그런 메소드 연기를 펼칠 만큼 악랄하지는 않았다는 게 부하들의 생각이었다.


마장디와 해군부 직원들의 반발에 이어 - 독자들이 제정신을 차리면서 - 기유마르의 회고록이 조작된 것 아니냐는 의심도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진 부사관이라면 주변에서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마장디와 르두타블 전 승조원들은 물론이고 해군들 중 누구도 '로베르 기유마르'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게다가 해군 부사관이 썼다기엔 해전이나 선상 생활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색한 점이 많았다. 사람들은 기유마르 회고록의 진실을 파헤치러 나섰다. 마침내 1828년, 기유마르는 가공의 인물이고 그의 회고록은 '오류와 정확하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한 픽션'임을 폭로하는 기사가 뜨면서 기유마르 회고록 붐은 막을 내렸다. 아마도 가짜 회고록을 팔아 한몫 챙기려고 했던 어느 무명 작가의 사기극이었을 것이다.  


에투알 개선문 동편 패널. 잘 찾아보시면 빌뇌브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유마르의 회고록을 읽었던 탓에 빌뇌브 암살 논쟁은 1830년대까지 각종 출판물에서 활발하게 언급되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시들해졌다. 애석하게도, 대중은 빌뇌브가 억울하게 살해당했는지 아닌지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목했던 건 '나폴레옹의 잔혹함' 이나 '제정 시기 비밀 경찰의 암살 행각'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뒷받침해 줄 소재였을 뿐. 따라서 빌뇌브 암살 논쟁은 나폴레옹의 어두운 면에 대한 가십거리들이 튀어나올 때면 같이 수면 위로 훅 떠올랐다가 거품이 꺼지면 푹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의 죽음 직후에도, 오메아라의 회고록이 나왔을 때도, 기유마르의 회고록이 나왔을 때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빌뇌브가 살해당했다는 별다른 물증이 없음에도, 설령 그가 살해당했다고 해도 나폴레옹이 암살을 사주할 이유는 딱히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기어코 나폴레옹이나 비밀 경찰의 이름을 끌어다 붙이며 그의 죽음을 음모론으로 재창조했다.


1806년 4월 22일 오후, 빌뇌브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브뤼에와 넬슨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 의무, 제독의 의무, 그가 완수해야 할 의무! 사실 그의 귓가에 맴도는 건 진짜 브뤼에와 넬슨이 아니라 황제의 분노에 대한 공포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대한 부끄러움이 만들어 낸 망령의 속삭임이었으나, 지독한 절망감에 사로잡힌 빌뇌브는 그 삿된 속삭임을 조언 삼아 자결해서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제독의 의무라는 비극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브뤼에처럼 제독의 자리에서 죽지 못했다. 호텔 방구석은 프랑스 제독의 지휘석이 아니었으니까. 넬슨처럼 신께 감사하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가 믿는 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신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들처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선택한 죽음 뒤에 그가 지키고자 했던 명예는 없었다.


빌뇌브의 죽음은 패배한 제독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행한 최후의 의무로 여겨지기는커녕 제국의 흑역사를 논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흥미거리로 전락했으며, 빌뇌브가 부당하게 암살당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피해자'의 무덤을 찾아 애도를 표하며 패장의 어깨에 지워졌던 책임감과 불명예의 무게에 공감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빌뇌브는 나폴레옹이 죽여 없애고자 했던 제국의 수치였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은 관리하는 이 없이 쓸쓸하게 풍화되어 이제 우리는 빌뇌브가 어디 묻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의 개선문이 한 시대를 빛낸 지휘관들의 이름 아래 빌뇌브의 이름을 품어 준 것은 약간 아이러니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암울한 비사를 이야기할 때나 거론되곤 하는, 당사자는 자신의 고독한 죽음과 함께 사라져 주길 바랐던, 그러나 의무를 다하지 못한 트라팔가르의 패배자로 영원히 남을, 그래서 아무도 추념하고 사랑하지 않는, 그 슬픈 오명을.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에투알 개선문, 생제르맹 성당

구글 스트리트뷰 캡쳐


참고자료

GUILLEMARD   Robert, Mémoires de Robert Guillemard : sergent en retraite, 1826.

THOMAZI Auguste, Les Marins de Napoléon, Tallandier, 2004.

VALODE Philippe, Le livre noir de l'histoire de France, Acropole, 2009.  

http://www.wiki-rennes.fr/La_mort_myst%%C3%A9rieuse_de_l%27amiral_de_Villeneuve#cite_ not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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