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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Jul 15. 2021

아무튼, 술집

인생에 슬럼프는 있을지언정 술럼프는 없는 사람

“소맥~? 야만적이야..”


혜경은 술을 싫어했다. 내가 삼겹살집에서 소주잔 두 개를 겹쳐 올려 소주를 계량한 후에 소맥을 한 잔 탁 말아서 건네주면 혜경은 나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몇 년 뒤, 혜경이 술과 사랑에 빠지게 된 건 이별 때문이었다. 구남친과 헤어지더니 술과 연애를 시작한 것. 그즈음 나도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마셔라! 부어라! 잘 헤어졌어! 아 몰라! 실연을 핑계로 술을 마시고, 마시다가, 마시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연인이 되어버렸다. 어라? 그런데 네가 내 남자 친구라고? 네~가~? 그녀가 술기운 하나 없는 맨 정신으로 나를 남자 친구라고 불러주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때부터 나는 혜경의 모든 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술 앞에서 매번 성실하게 취했고, 어김없이 비틀거리며, 술집 테이블에 머리를 쉼 없이 조아렸기 때문이다. 혜경이 살고 있던 집부터 지금의 신혼집까지, 나는 알코올을 처음 맛본 원시인처럼 취한 그녀를 등에 업고 돌아다녔다. 술 먹고 기억을 잃어도 눈만 뜨면 집인 게 신났던 김혜경은 나를 순간이동 마법사라고 불렀다.


“네가 타 준 소맥에선 풋사과 맛이 나.”


야, 처음엔 야만적이라며!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혜경은 이제 나를 과수원 농장 주인이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질수록 그녀의 삶도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다. 술 앞에선 태초의 순수함을 지녔던 원시 시절을 지나, 마법처럼 술과 사랑에 빠지던 판타지 시절을 거쳐, 이젠 술을 과일처럼 받아들이는 목가적 시절까지! 술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무언가에 취한다는 건 그것에 푹 빠진다는 걸 의미하고, 사람은 마음을 쓴 만큼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혜경은 분명 술과 함께 성장했다. 마음을 비틀거리게 하는 일을 소주 한 잔으로 잊을 수 있는 사람으로, 못 먹는 음식은 많아도 못 먹을 안주는 없다고 말하는 미식가로, 울렁거리는 일상을 뜨끈한 해장국으로 달랠 수 있는 어른으로 말이다. 혜경이 숙취와 취기 사이에서 틈틈이 쓴 책 <아무튼, 술집>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다. 숙취를 호소하면서도 꿋꿋이 일어나 다시 술집으로 향하는 사람에겐 어떤 용기가 느껴진다. 취기도 때론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걸 혜경의 글을 읽으며 새삼 느낀다.


"취하지도 않을 거면 술을 왜 마시냐!"


혜경에게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술 앞에서 온몸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슬럼프는 있을지언정 '술럼프'는 없다. 술과 술집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에서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한다. 술에 대한 진심이 가득 고여 찰랑인다. 그러고 보면 혜경의 글은 찰랑이는 술잔처럼 마음속 무언가를 찰랑거리게 만든다. 눈물 같은, 아니면 군침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뒤엉킨다. 책을 덮고 나면 술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든다.


그러니까 이 글의 결론은.. <아무튼, 술집>은 단 돈 9,900원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 그 돈으로 편의점에서 네 캔 만원 맥주를 사거나, 술집에서 소주 세 병을 주문하는 것도 기쁜 일이겠지만, 가끔은 취하기 좋은 책 한 권을 덥석 구매하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술처럼 당신을 취하게 하지만, 술과는 다르게 숙취는 없으니까요!


2018년 여름의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흥청망청 혜경과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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