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맞은 상자에 맞는 알맹이를 넣는 것.
단순하지만 일의 구조, 프로세스, 조직화는 결국 알맞은 상자에 알맞는 콘텐츠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인지, 사람인지, 무형인지, 유형인지에 따라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쯤이면, 엄마의 시간표에 맞는 나의 일을 재정비할 수 있을까?"
30대의 내가 친구들에게,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지인들에게 참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구체화시켜보자. 도와줄께" 이런 식의 답을 다양하게 했던 것 같다.
지금, 40대의 나에게 스스로 매일 질문한다.
경험과 경력과 실패와 도전가운데 근육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질문 앞에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게 답답하다.
최근 들어 욕구, 욕망, 욕심 이런 키워드를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에는 그닥 욕심이 많지 않았던 나는, 유독 '일'의 문제만큼에 있어서는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디테일한 완벽이 아닌, 전체적인 구조의 시작과 끝까지의 완성도.
초반과 마지막의 한 단계의 스텝을 넘긴 후에는 타인에게 과정을 넘기고 자유로워졌지만, 처음과 끝의 정확함, 적확함 만큼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만 2년이 막 넘은 육아 속에서도 나의 욕심이라기 보다 높은 기준이 보인다.
일반 엄마들처럼 먹는 것, 입는 것, 청결 등에 기준이 높은 편이 아니고, 교육의 정보에 대해서도 느슨하다.
그건 그 때가서 고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이의 단계별 관계와 적절한 가이드라인, 일상성의 구조화, 이런 알 수 없는 패턴을 잡아가는 시기 만큼은 엄마인 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아이에 맞게 양육하고 싶다는 욕심아닌 욕심.
몸으로 하는 에너지와 수고가 많이 드는 일도 아닌,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멈춰 있어야만 하는가? 라는 내면의 논리적인 반발과 함께.
이 관점 만큼은 누군가에게 맡길 수가 없는 것이다. 별 것 아니지만, 함께 있어야만 (being), 시간을 통해서만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세울 수 있는 일.
오늘도 여전히, 욕심 아닌 이상한 욕심과, 익숙했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가운데, 헤매임을 반복하고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분명 이 헤매임이 자산과 열매로 나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