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팝과 툴루즈 로트렉
지난 몇 년 전부터 유튜브를 중심으로 1980년대 일본 대중음악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야마시타 타츠로, 오타키 에이치 등 당대 일본을 뒤흔들었던 아티스트들의 음악은 시티팝이란 장르로 불리며 30년 역주행을 거뜬히 보여주었다. 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1984년 발매된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는 시티팝 감성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공식 뮤직비디오도 아니고 한 팬이 유튜브에 올린 노래 한 곡이 조회수가 3천만에 가까운 이 현상은 단순히 일시적인 유행이라 치부할 수 없다.
1980년대 일본은 어떤 시대인가, 역사에 비추어보자면 에도시대 그다음으로 일본 역사에 유례없는 경제적, 문화적 호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출 제조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누릴 수 있었던 화려한 시절은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승승장구하던 국내외 경제 사정은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수출 적자를 보던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985년 강요한 플라자 합의가 그 시작을 알린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렇지만 이런 배경을 굳이 알고 있지 않더라도, 노래를 듣는 순간 시티팝 감성의 깊은 기저에 공허함과 불안정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산뜻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또한 인스턴트적 관계의 슬픔뿐만 아니라 도시의 밤 속에 감춰진 사람들의 방황과 깊은 고독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노래의 마지막에 구간 반복되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I'm just playing games
I know that's plastic love
Dance to the plastic beat
Another morning comes
19세기 말 파리로 거슬러 가보자. 여기 안쓰러운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앙리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다. 그의 키가 140cm 남짓에 불과한 이유는 근친상간에 의한 유전적인 변이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한 유서 깊은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그는 주류 귀족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았고, 평생을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앙리의 또 다른 콤플렉스는 아버지였다. 귀족의 전형인 아버지 알폰스 백작은 풍성하게 수염을 기르고 사냥 나가기를 좋아하는 마초였다. 앙리 또한 말을 사랑하고 승마를 동경했지만,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버지와의 비교가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평생 알폰스 백작은 환락가 그림을 그리는 아들을 부끄러워했고 앙리는 위선적인 귀족형 아버지를 혐오했다.
그런 그가 파리의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 것은 도시의 어둠을 밝혀주는 화려한 밤 문화를 그림에 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세기 말 파리는 이른바 좋은 시절을 의미하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리며 몽마르트르 언덕을 중심으로 회화, 극, 음악, 문학 등 각종 예술의 성지로 여겨졌다. 앙리도 반 고흐, 폴 세잔 등의 당대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 풍광을 충실히 담아내었다.
그가 작업한 포스터들은 벽에 붙기만 하면 풀이 마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떼어갈 정도로 인기가 굉장했는데, 때문에 그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도 불리지만 모던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1882년 개장한 카바레 물랭 루즈의 간판 공연 La Goule를 홍보하는 포스터를 보면 특유의 색채 감각, 유머러스하게 장면을 포착하고 레이어를 겹치는 선구안, 레터링의 세련된 배치가 탁월하다.
스케치, 유화, 석판화 등 소재와 도구를 막론한 앙리의 작품들 속에는 일관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소수자를 비웃고 경멸하는 상류사회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주요 소비자라는 위선과, 착취의 끔찍한 이면, 그리고 외면받는 존재들의 슬픔을 드러낸다.
그런 그의 작품들을 관철하는 단 하나의 강렬한 공포가 있다. 바로 외로움이다. 그는 가장 화려한 도시의 한가운데 있었다. 불빛, 음악과 춤이 있는 그 밤이 지나면 언젠간 아침이 오고 자신은 혼자일 것임을 그는 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그림으로도 달랠 수 없던 공허의 자리에 독주를 부어 채웠고, 40세까지 그림을 그릴 것이라던 바람을 이루지 못한 채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콤플렉스 덩어리인 내가 사랑받을 수 있을까. 플라스틱이 아닌 영원한 사랑을 꿈꿀 수는 없을까. 우리가 1980년대 일본의 시티팝을 듣고, 앙리의 그림 속에 담긴 19세기 말 파리의 정경을 흠모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때처럼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화려한 도시와 군중 속에서 비록 우리가 찬란했지만 외로웠다고. 다시 말해 역사가 추억하는 그 좋았던 시절을 상상하고 동경하며 바로 지금, 현재를 위로하는 것. 벨 에포크가 가여운 우리에게도 허락될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간절히 갖는 것.
《툴루즈 로트렉 展: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은 1월 14일 시작되어 5월 3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된다. 그의 작품 150여 점이 국내에 최초로 공개되는 첫 단독 전시회로, 그리스의 헤라클레이돈 미술관 소장품 순회 전시의 일환이다. 이번 전시에선 유화 작품보다는 연필과 펜 드로잉, 일러스트, 석판화(리소그래피), 포스터가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2020년 2월 11일
Plastic Love, by Mariya Takeuchi. VARIETY(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