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 리뷰
영화는 결말부터 시작된다. 총성이 울리고, 시계는 40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의 총성이 있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흔들린 충성이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이라는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김충식 작가의 소설 〈남산의 부장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사건의 주역 인물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내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경우 김규평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이병헌이 역을 맡았고, 대통령 박정희 역을 맡은 배우 이성민은 박통으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배우 곽도원이 박용각으로 연기하였다. 배우 이희준은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을 곽상천이라는 이름으로 연기했다. 이들 모두 영화에서 대개 김부장, 박부장, 곽부장으로 불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소설적 상상력이 총동원되어 가공된 인물들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빠져들게 할만큼 매우 입체적이고도 뚜렷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김규평은 차갑고도 건조한 특유의 모습으로, 첫 등장부터 관객을 압도시킨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 날카로운 눈동자를 가리는 안경,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까지. 이에 흡사 사채업자 대부같은 모습의 박용각과 깡패같은 곽상천의 행동이 대비되면서 김규평이 더욱 돋보인다.
그러나 인물들은 단순한 선악 대비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 모두 권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인정 투쟁의 결과는 결국 무엇인지, 복잡하고도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역사의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수도 있다. 결국 저들이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연출을 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이 영화는 매우 뚜렷한 명암을 가진다.
첫 번째 명암은 장소이다. 특히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장소를 일컫는 명칭들이 적절한 카메라 샷과 결합되어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박정희의 안가인 궁정동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어두운 밤, 요새와 같은 담벼락을 넘어 창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밝은 빛이 강조되는 식이다. 또한 영화는 중앙정보부를 중정, 혹은 남산 두 가지 명칭으로 일컫는다. 필자가 느끼기엔 중앙정보부의 권위, 권력을 향한 숭배가 드러나야할 때엔 중정이, 음침한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 듯한 어두운 느낌을 나타낼 때엔 남산이란 표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였다. 드론샷 또한 적절히 사용된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 김규평이 탄 차가 어디로 가지 않는지에 주목해보라.
두 번째 명암은 공기이다. 영화는 밝지만 눅진한 담배 연기가 가득해 뿌옇기만 한 양지와, 어둡고 축축하지만 선명하다못해 날카로운 음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전자는 박통을 둘러싼 공기이고 후자는 김규평이 존재하는 공기이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옷장 도청 장면은 이 대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데, 박통과 곽상천이 따뜻한 안가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비에 젖은 몸으로 이를 듣고 있는 김규평의 모습을 그린다. 이때 박통이 컬러 TV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나는 흑백이 좋아". 실제로 영화 곳곳에 흑백으로 된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그 이미지들은 마치 진공의 상태에 놓인 것 마냥 바싹 건조된 상태로 드러난다.
소설의 원제를 살려 개봉된 영화는, 영어로 The Man Standing Next로 번역되었다. 박통을 보좌하는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 중 정확히 누가 권력의 실질적 2인자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마치 거대한 산사태의 전조처럼 흙이 흩어지고 돌이 굴러가는 상황 속에서, 무너져내리는 권력 옆에 선 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영화는 The Man, 바로 그 사람의 심연을 차갑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2020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