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Jan 18. 2024

묵호의  햇살

하루 여행

14살이나 많은 친구랑 묵호를 간 적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내가 부지런하고 열정 있는 친구의 여행길에 호응하지 못해 아쉽고 미안했던 지난여름 일이다. 그럼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처음 먹어본 장칼국수, 논골담 길에서 바라본 묵호항, 여행책방 <잔잔하게>, 연필박물관 카페의 고즈늑함을 잊을 수 없어 새록새록 고마운 시간으로 남았다. 비슷한 어감의 '목포'만큼 인지도가 없어 친구가 소개하지 않았다면 멀게만 느껴졌을 강원도 동해의 작은 마을 묵호.


반려자 운을 묵호에 데려가고 싶었다. 멸치국수와 회를 좋아하고 가끔 고향 부산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묵호는 우리가 살았던 부산의 내륙지역이 아니라 바닷가 감천마을을 닮았다. 25년을 살았어도 여전히 외지인 모드인 나와 달리 강이 아닌 바다가 불쑥 그리운 운은 부산 사람임에 틀림없다. 오직 푸르디푸른 동해만이 그에게 바다다. 묵호는 그 바다가 출렁이는 곳, 불편하고 든든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애틋한 고향의 공기를 잠시 가져보기를 바랐다.



바닷길

서울에서 출발한 묵호행 KTX는 강릉 근처에서 아래로 꺾어져 바닷길로 접어든다. 정동진 짙은 코발트색 바다가 차창 가득 들어오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여행세포는 살아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이 목적지인지 우르르 내리고 다시 출발하는 기차는 훨씬 가볍다. 간간이 들리는 수다 소리는 새로운 출발처럼 경쾌하다. 여전히 눈길은 차창밖에 머문다. 친구, 연인,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 무리가 푸른 바다랑 풍경이 되어 신작로 포플러처럼 슉슉 지나간다. 망상 해변쯤 일까. 뚝 떨어져 혼자 바다를 응시하는 어떤 이의 뒷모습은 고독하나 외롭지 않다.


걸어서 찾아가기

책도 여행도 매번 새로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젠 읽었던 책에서 발견의 기쁨, 가본 곳을 다시 찾아갔을 때의 편안함이 좋다. 지난여름 기억을 더듬어 역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연필박물관을 등대 삼아 오른쪽으로 걷는다. 두 번째임에도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는 길치에게 묵호는 만만함보다는 정겨움일 것이다. 예상은 맞아 곧 여행책방이 나오고 그때 책방지기가 가르쳐준 장칼국수집이 있는 중앙시장이 보였다.

몇 개월 사이에 물가가 많이 올라서인지 기대했던 빨간 고추장 국물 칼국수에는 홍합이 줄었고 밑반찬은 썰렁하다. 그러나 운은 이것이 처음, 내가 맛있었던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잘도 먹는다.


몸을 뜨끈하게 데우고 길 쪽으로 나오니 산복도로로 올라가는 철재 계단이 바로 건너편 언덕에 기다랗게 붙어있다. 계획하지 않은 다음 일정이 보였다. 저 계단을 올라 바다를 굽어보며 C자 곡선처럼 앉은 덕장마을을 걸을 것이다. 이름처럼 논골담길이 생기기 전에는 명태, 오징어를 말리던 곳이라 했다. 끝자락에는 등대가 있는 도째비골이 있어 올랐던 논골담길을 반대로 내려오는 게 된다.

바람이 순하고 따뜻한 햇살 세례를 받는 언덕 동네, 바다를 바라보며 혹은 옆에 두며 오르락내리락 걷는 마을길은 재밌고, 멀리 서는 아름답다. 세상의 바닷가엔 왜 이렇게 비탈진 곳에 마을이 생기는지 몸으로 걸어보니 알 것 같다. 오르내리기 힘드니 땅값이 저렴할 것이고,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할 것이다. 자연에 기대어 살았기에 지금보다 훨씬 집 위치가 중요했을 서민들의 삶이다. 지금은 벽화로 단장하여 사람들을 불러들이나 여전히 명태를 말리기도 곳곳에 빈 집터의 흔적이 있어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핏줄 같은 좁은 길은 뜻밖의 남의 집 마당으로 데려다 주니 말수는 줄이고 조심하며 걸어야 했다.


햇볕 쬐기

따뜻한 날이었지만 바람은 불고 겨울은 겨울이다. 언덕길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희한하게 겨울 속 봄날 같은 장소가 두어 번 나타났다. 바람은 없고 햇살만 가득하여 저절로 가던 길 멈추게 되는 곳, 두어 발자국 간격으로 공기가 달라지는 곳이다. 오두막 옆 그네벤치가 그랬고 나무계단이 있는 작은 광장이 그랬다. 우리는 카페 대신 오래 앉아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흡족해했다. 여름이면 그늘을 꼭 찾아 걷는 사람들에게 겨울햇살은 그렇게 귀하고 반갑다. 천천히 걷다가 멈추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발견의 공간이다.

그네벤치에서 바라본 액자 같은 풍경(좌)과 바람 한 점 없이 햇볕만 가득했던 작은 광장(우)


회에 대한 오해

회를 뜨는 지방마다의 차이를 생각지 못한 입 짧은 소시민의 순진한 오해다. 회는 지방색이 아니라 바다색이라는, 쓰고 보니 그럴듯한 고정관념이 있었나 보다. 부산에서 모름지기 회는 하얀 면포에 물기를 가두어 펼친 고슬고슬한 것이었다. 물회 속 회는 들어있는 채소랑 어우러져 튀면 안 되었고. 경기도 동쪽으로 이사와 가장 아쉬운 게 그것이었다. 마음먹고 들어간 횟집의 회는 물기가 질척했고, 더위에 별미라고 먹어본 물회 속 덩어리진 회는 입맛을 더 베렸다. 여기는 바닷가가 아니라서 회를 뜰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게를 한다고 의심하고는 마트에 포장된 회를 가끔 사 먹었다.

묵호의 노포, 전통이 있다는 그 횟집에 다시 갔다. 친구랑 걷다가 대충 들어간 곳이었는데 깔끔하고 더위에 지쳐 후루룩 먹은 물회 맛이 일품이었다는, 갈수록 부풀려지는 기억이 묵호행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운은 모듬회를 주문했다. 싱싱한 채소와 적당한 크기의 생선 배열은 괜찮았고, 한 입 물자 생각한 그것은 살짝 비켜갔다. 이어 시킨 물회 속 회는 썰다만 것처럼 덩어리가 져있고. 아, 이건 실수나 실력이 아니구나! 원래 강원도쪽은 이렇게 물기가 있고, 많이 씹히라고 물회 속에 덩어리를 만들어 넣는 것이구먼. 두번 가지 않은 동네 횟집 이름이 <정동진 회 뜨는 집> <대포항(속초) 횟집>.. 모두 강원도 지명이라니! 오해가 풀리니 입이 길어졌다. 처음 먹어본 학꽁치 회는 고소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끝까지 이어졌다.


옛 영광과 아버지

"근데, 장인어른은 이 작은 곳에서 뭘 하셨을까?"

젊은 시절 주문진, 묵호에 머물렀던 아버지를 두고 운이 하는 말이다. 지금은 소박한 바닷가 동네지만 전쟁 중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더라. 어떤 경상도 사람도 도착하여 오가는 배를 상대로 기름을 팔았다는데, 고향에 있는 갓 결혼한 막냇동생(아버지)을 불러들일 정도로 사업이 번성했다. 새색시 아내를 두고 먼 강원도 땅까지 내달린 아버지의 속내는 사실 형님 사업을 돕기보다는 군 기피자의 은둔이 목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갖은 고생을 하였으나 60년대로 접어들며 인생의 전성기를 맞는다. 1964년 국제항으로 승격된 묵호항처럼. 삼척의 시멘트, 양양의 철광석, 동해안의 수산물을 수출하였던 항구로, 5만톤 이상의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시설을 갖추었을 정도였다니,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그 시절의 영광이다.

동해의 바닷가 어디쯤에 수영복을 입은 날렵한 몸매의 아버지가 서 있다. 한컷 포즈를 잡은 흑백사진 속 젊은 아버지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 숨차게 뛰어다니다시피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들어본 적 있지만 잊었던 아버지 이야기가 소환되다니, 묵호는 항구가 맞다. 가수 이미자의 노래 <눈물의 묵호항구> 가사처럼 아버지, 남편이었던 사람들의 온갖 사정이 깃들어 있는 곳.

여름의 묵호항



어둠이 내리는 어시장을 통과하여 역으로 갔다. 서울 가는 기차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작은 역 대합실이 사람들로 찼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랑 오늘 묵호에서 같이 있었나 싶어 조금 놀랍고, 헤쳐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살짝 정겹다.

기차는 출발하고 술이 한잔 된 옆자리 사람은 이내 골아떨어진다. 혹시 꿈이라도 꾼다면 영도 바닷가 친구집이 노을빛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지. 말표현이 서툰 운이 떠듬떠듬 들려준 흰여울마을의 석양이 왠지 뭉클했었다. 가난한 친구집 마당을 꽉 채운 따뜻한 석양의 빛깔과 온기는 젊은 운의 가난한 마음에 들어와 쓸쓸함을 남겼다. 슬픔이나 쓸쓸함 마저도 들어올 틈이 없었던 억눌렸던 마음에.

우린 바다를 보며 대낮의 햇볕을 한껏 쬐었다. 석양이 되기 전 고슬고슬한 햇빛을.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