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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pr 08. 2024

그림책 <꽃할배>

feat. 고추냉이꽃

꽃을 좋아했던 어느 남자의 이야기가 은은하게 다가온다. 소년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던, 잔잔한 들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이야기.



들로 산으로 다니는 소년의 지게에는 들꽃이 가득했다. 쇠꼴이나 나무가 한 짐 있어야 할 그곳에 쓰잘 데 없는 꽃이라니, 어른들은 나무라며 문밖으로 꽃을 패대기쳤다.


열여섯 살에 네 살 위인 여자와 결혼한 소년의 지게에는 여전히 꽃들이 그득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지게를 빼앗고 장에 가 푸성귀나 팔아 오라고 했다. 꽃다발처럼 예쁘게 묶어 놓은 푸성귀들은 손님들에게 구경거리일 뿐이다.

아버지가 되었다. 엄마는 밤늦도록 삯바느질에 고단하여도 술이 한잔 된 아버지의 콧노래와 붉은 얼굴은 그날 밤 휘영청 높게 뜬 보름달처럼 부풀기만 했다. 아버지는 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깨워 마당에 쭉 세웠다. 아이들이 환한 보름달 빛에 부셔 눈을 감은 사이 불콰한 얼굴의 아버지 손은 또 무언가를 위해 꼼지락 거린다.


다음날 아이들이 발견한 것은 마당에 늘어선 조약돌들이다. 달빛아래 아이들 그림자 따라 수놓아진 조약돌. 장독대 모퉁이에서 담배 한 대를 문 아버지는 아침부터 그림자 그림을 물끄러미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연기는 봄날의 꽃잎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런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고, 어느 봄날에는 자연으로 돌아갔다. 자식들은 무덤을 온갖 봄꽃으로 둘러 주었다.



꽃과 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보통 남자들의 이야기가 글과 영상에는 자주 등장한다. 직장 근처 산을 매일 산책하다 책을 펴낸 이의 사색 가득한 사계절 모습은 시인의 영롱함과 다르지 않았고, 열매가 아니라 꽃을 보기 위해 매실나무 가꾸기에 일생을 바친 이의 영상은 숭고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무용한 것에 정신을 쏟는 이를 주변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바깥양반으로 불린 시대의 가장이 만약 그림책 속 아버지 같다면.. 내용처럼 아내는 늘 고단하고 불만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들은 아버지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 들은 이야기, 무용한 꽃을 좋아하는 아버지 이야기는 귀하여 이렇게 또 그림책이 되었다. 귀한 것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리움은 따듯한 정서가 되어 때때로 몰아치는 혹한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 건 꽃할배의 마음처럼 귀한 선물을 받고 나서다.

삶을 가꾸는 진솔한 글을 쓰는 Y언니가 보내온 고추냉이 꽃대. 흔히 알고 있는 뿌리를 사용하는 와사바가 아니고 잎을 먹는 채소 고추냉이가 있다. 잎 수확을 위해서는 지금 한창 올라오는 꽃대를 잘라주어야 한다는데, 그 꽃대도 식재료가 된다고 한 상자 보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전 일찍 온 택배 박스를 열고 조금 놀랐다. 풋내가 살짝 좁쌀 같은 하얀 꽃봉오리가 조랑조랑 매달린 초록들!  이맘때 먹을 수 있는 달큰한 시금치, 겨울초 꽃대를 닮았다. 일단 위에 있는 것을 조금 덜어 꽃이 떨어지지 않게 살랑살랑 씻어 알려준 대로 샐러드를 해보았다. 부드럽고 아삭하고 알싸하고 쌉싸름한 맛이 독특하게 맛있다.

남은 것은 무엇을 해 먹나 양을 가늠하려 상자에 손을 넣어 꽃대들을 일으켰다. 손끝에 닿은 하얀 꽃망울들이 말을 거는 것 같다.  오느라 조금 시들었지만 물에 함 꽂아볼까,라는 퍼뜩 떠오른 생각. 물에 꽂는 건 쉽다. 놀랍게도 슬슬 살아났다. 쳐져있던 꽃대가 하룻밤 지나니 꼿꼿이 서고 꽃이 하나둘 펼쳐지기 시작했다.

신기해서 자꾸 쳐다본다.

먹거리가 아니라 화사한 봄이 집에 들어왔다. 해야 할 음식들이 저쪽으로 밀쳐지는 듯하다. 겉절이, 샐러드, 장아찌…


길에는 화려한 봄꽃들이 봇물처럼 한꺼번에 터졌다. 기다리던 꽃들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가던 길 멈추게 되지만, 쇼윈도 멋지나 사지 않을 옷처럼 발걸음은 서성이다 지나갈 뿐이다. 벚꽃을 찾아다니던 시시하고 깜찍한 행보들은 어디로 갔을까. 철이 들었나, 아니지, 철은 계절을 아는 마음이라 했는데, 그럼 나의 봄은 어디로 갔을까, 사방은 온통 뿌연 미세먼지였다.

기대하지 않은 고추냉이꽃이 살아났다. 화려하진 않아도 다닥다닥 붙은 작은 꽃잎에서 봄을 만났다. 잠시 멈칫했지만 끝까지 꽃을 피워낸 은근한 생명력, 그래 봄이니까!







*꽃할배/ 윤혜신 글, 김근희 그림/ 씨드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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