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얕고 좁은 지적이지 않은 대화
나리와 나영은 서로 높임말을 하는 친구 사이다. 알고 보니 이름 한 자가 같다는 것 빼고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두 사람. 고향도, 학교도, 나이도, 일터도, 사는 동네도 다른 두 사람이 가까워진 데는 젊은 엄마들의 껌딱지, 아이들이라는 메신저가 있다. 과외 교습을 하던 나영, 의 동네에서 나리는 미술학원을 하고 있었고 서로의 아이들이 서로의 학원에 간 인연으로, 학부모와 선생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 꼬마들은 자라 각자 다른 곳을 보며 살지만 팽창을 멈춘 그들은 익숙함에 물들어 여전히 서로를 불렀다. 깍듯이, 슨생님!이란 그때의 호칭으로.
중간에 연락이 끊어져 소원한 시기도 있었으나, 알고 보니 둘 다 살던 바닷가 도시를 떠나, 서울 근교에서 개미만 한 존재가 되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오늘 만남을 위해 과거 어느 날 조우했을 때 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여전히 어머, 슨생님!
모처럼 볕 좋은 가을날, 둘은 나영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한적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동네 카페에 들어섰다. 작은 마당에 어울리지 않게 가이즈카향나무 고목이 멋대로 뻗어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연상되는 그곳에는 쪽 곧은 가지 두 개를 새끼줄처럼 꼬아 올려 버섯 모양으로 수형을 잡은 뽕나무도 있다. 뽕나무인 이유는 까만 오디가 열려있는 걸 지난봄 나영이 분명 보았기 때문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가위손을 많이 탄 이름 모를 정원수일 뿐인 그 나무 옆에 하얀색과 파란색이 직조된 야외용 의자와 테이블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 없는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앉는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그러게요!
사실 두 사람은 여느 친구사이처럼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거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서로의 말에 흠뻑 빠져드는 경우는 드물다. 접점이었던 아이들이 다 커버렸으니 현재 공유할만한 솔깃한 주제가 딱히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있긴 하다. 불안과 염려증이 자주 올라오고 온몸이 시시때때로 아프다는 것. 그날도 먹는 신경이완제와 상처를 잘 아물게 하는 특효의 습윤밴드를 공유했다. 발을 헛디디거나 자전거를 타다가 느닷없이 길에서 엎어진 이야기를 하소연하며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는 이 여자들.
대부분은 책과 글쓰기에 빠져 현실을 자기 세계에 가두는 나영과 예술을 했지만 지극히 보이는 세계에 몰두하는 나리는 이야기가 겉돈다. 그럼에도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가 내놓는 마법의 장소에서 둘은 놀란 눈으로 합장하며 합창한다. 슨생님! 여기가 어딥니꺼? ? 아, 두 가지네..
나영은 만남과 만남 사이에 읽은 책을 나리에게 썰을 풀고 싶지만 자제한다. 언젠가부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스스로 금기가 되어 내놓지 않았다. 대신 나리의 일터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어주려 애쓴다. 온갖 사람들이 몰려드는 그곳에는 귀가 살짝 열리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집사를 데리고 와 옷을 산더미처럼 사 간다는 동남아 부인,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데 천재적 소질이 있는 동료, 30년 전 단골이었던 보세가게 주인이 다른 층에서 여전히 옷 가게를 하고 있더라는, 눈인사만 하는 사이인데 어느 날 나리를 위해 눈물까지 흘려준 동료 이야기 등,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게 점점 힘든 나영에게 나리의 세상 이야기는 잔잔한 놀라움과 감동을 주기도 했다.
슬슬 듣는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쯤 나영은 하릴없이 가방을 뒤적이곤 하는데, 그날은 습관처럼 들고 나온 시집이 손에 잡혔다. 그날따라 시골 카페에는 다른 손님이 없고.
슨생님, 오늘 날씨도 가을가을인데 시 하나 읽어볼까예? 이 시집에 우리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아,,, 네 좋습니다!
소리 내어 읽어 본 지 오랜만인, 혀가 잘 꼬이는 나영은 어색하나 입모양을 글자에 맞게 만들어 가며 공들여 읽어본다.
어머, 슨생님! 뭐가 훤히 그려지네예.
그렇죠, 그래서 저도 이 시집이 좋더라고예.
..
선생님, 저도 요새 관심 가는 시집이 있습니더!
그래요? 뭔데요?
아, 어디서 몇 개 봤는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는데.. 저는 마, 길고 머리 아픈 건 질색이잖아요. 근데 이 시는 짧으면서도 명쾌하더라고예. 재밌기도 하고.
시집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인가예?
네, 아마..
나영은 폭풍검색에 들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아하! 하이쿠?
맞아요, 하이쿠!
누구 시를 보셨어요?
하이쿠, 하이쿠인 것 같던데..
그니까 하이쿠 시인 중에 누구인지? 바쇼라는 시인이 젤 유명한데.. 다른 일본 시인들도 많겠죠?
슨생님, 하이쿠가 시인 이름 아닙니꺼???
네? 하이쿠는 일본의 정형시를 이르는 말이예요. 우리 시조처럼 딱딱 글자수를 맞추는거 있잖아예. 서양에는 소네트라는게 있고. 저도 최근에 알았어요! 하하!
아…… 그렇구나! 무식해서리, 저는 시인 이름이 하이쿠인 줄 알았심니더.
시인 하이쿠! 하이쿠 시인 하이쿠, 하하!
슨생님 잘됐어요, 이 동네에 일본문학을 번역 출판하는 부부가 작은 책방을 하고 있거든요. 저도 딱 한번 가봤는데, 그때 둘러보니 하이쿠 시집이 많더라고예. 사지 않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오늘 가서 함께 사욧!
그래요? 저도 몇 권 살랍니더. 골라주세요.
카페 사립문을 주섬주섬 나온 두 사람은 동네 우물가를 지나 큰길 교회 맞은편 동네 책방에 들어섰다. 자주 조용할것만 같은 책방이 경상도 여자들 사투리로 들썩여 책들이 모처럼 놀라고 긴장했을 것이다. 바쇼 하이쿠 선집.. 하루하루 하이쿠.. 봄에는 와카를 가을에는 하이쿠를.. 하이쿠의 사계.. 네루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아.. 셰익스피어도.. 피천득.. 이것도.. 오모, 슨생님..
많이 사시네예.
제가 또 사모 마이산다 아임니꺼.
약 사진이 오갔던 두 사람 카톡방에 ‘시’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읽다가 좋은 시 있으면 공유해요)))
네~~그래야지예~~
하이쿠도 배우고
소네트도 배우고
시조도 배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