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수사경찰 - 3화
우리는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것들이 여러 개 있다. 물론 물려받고 싶은 거은 안 물려받고 안 물려받고 싶은 것은 필요충분조건처럼 받기도 한다. 내가 가장 안 물려받고 싶었던 것이 그중 하나가 옷을 고르는 감각이다.
이것은 노력과 모방으로 조금은 달라질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타고 난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봐도 옷을 참 못 입는다. 가족들이 외출을 할 려고 하려면 엄마의 잔소리부터 시작된다. 여러 번을 거쳐 입고 나온 아버지의 복장은 내가 봐도 색깔부터 어색하다. 몇십 년을 새로 옷을 사지만 늘 그 옷이 그 옷이다.
물론 그것을 내가 그대로 물려받아 모든 옷이 평준하 되어있다. 검은 티와 검은 운동복 바지, 우리 둘 때문에 엄마는 외출시간이 늘 부족하다. 반대로 어머니는 아무것을 입어도 딱 맞게 입으신다. 그냥 타고난 것 같다. 셋이 여행을 가거나 외출을 하면 어머니는 늘 패션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 감각은 노력보다는 태어날 때 덤으로 갖고 태어난 것 같다.
옷은 예전부터 우리에게 예의 중 하나였다. 성리학을 종교 수준으로 믿던 조선시대에는 함부로 옷을 입지 아니하였고 상황에 따라 절차에 맞는 옷을 중요시했다. 그에 따라 외출할 때뿐만 아니라 집에 있을 때에도 맞춤옷이 따로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자 삶의 멋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옷은 온도 조절과 몸을 거리는 면 외에 그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패션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여러 가지 옷을 사주어도 언제나 편한 옷 세 가지를 돌려 입어 왔고 옷에 돈을 쓰는 것만큼 이해되지 않는 문화도 없었다.
30대가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을 꼽으라면 ‘옷’ 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복을 입어와서 몰랐지만 20살 대학을 갔을 때 옷을 얼마나 못 입는지 알 수 있었다.
20살이 되도록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었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은 명동이나 동대문에서 옷을 잔뜩 사 오는 동안 단순하게 구제 옷을 잔뜩 사거나 인터넷에서 편한 옷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이 전부였다.
소개팅을 나갈 때 마저 공용 반팔 티를 입고 나가다 보니 친구들은 자신의 옷장에서 억지로라도 꺼내 주면서까지 차려 입혀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의 편한 옷 지향 주의는 변하지 아니하였고 연애를 하면서도 가장 많이 입었던 옷이 츄리닝이었다. 그래도 그런 덕분인지 모든 게 싫었던 군대에서도 사시사철 옷 걱정 없이 같은 옷만 입어도 된다는 사실만큼은 2년 동안 만족해왔다. 난 똑 같이 옷 입는 것이 너무 마음 편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경찰에 합격하고 나서 교육원에서 보내는 1년 동안 평상시에는 제복을, 쉴 때에는 학교 측에서 제공한 운동복만을 고집해 입었다. 혹여나 결혼식 등 차려입어야 할 때가 오면 2주 전부터 주변 백화점에 가서 고르고 골라야 겨우 한 벌을 사 입고는 다시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놓고는 했다.
따라서 경제 수사과로 발령 날 때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 가였다. 경제범죄 수사과는 지구대나 파출소와 다르게 제복이 아닌 평상 복을 입어야 하는 부서라기에 고민이 되었다. 따라서 발령지에 도착하기 한 달 전부터 아웃렛 주변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적당한 가격의 셔츠 4벌과 바지 2벌을 구매하였다.
그러나 고르고 고른 옷들은 첫날부터 단추가 목을 옥죄어왔고, 슬랙스 바지 위 벨트는 허리를 압박하는 등 매우 불편하였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면 괜찮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꾸준하게도 옷을 다린 채 30 평생 처음으로 무언가를 차려입은 채 활동을 하였다.
3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셔츠에 양복바지는 온몸에 사슬을 감은 듯 불편함을 주었다. 매주 같은 셔츠에 바지를 입어왔음에도 옷들은 자석은 N극과 N극이 만나듯 서로를 밀어냈고 퇴근 후 셔츠를 내던졌을 때 비로소 해방감을 맛보듯 느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옷도 S극이 되어 나를 끌어당기길 바랬지만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날씨가 무더워짐에 따라 빨래를 하였으나 다 말리지 못한 셔츠들로 인해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간 적이 있다. 공부할 때와 같이 편한 복장에 나도 모르게 매우 편한 게 출근할 수 있었고 오전 내내 불편함 없이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도 편한 복장을 여태까지 고수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그제야 마음속으로만 생각해왔던 “수사관은 사건에만 집중하면 되지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라는 고집이 문득 떠올랐다. 팀장님은 옷을 제대로 입고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역시 경찰로써 예의라고 하셨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여도 마음 한 구석에는 옷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냐며 의문점만 커져갔다.
이후로 일주일간 마치 고시원에 다시 돌아온 듯 나의 옷차림은 나날이 후줄근해졌고, 주변 경찰 선배들은 나에게 “공시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가나 말거나 사건에만 집중하게 되어 오히려 좋아졌다는 생각에 셔츠는 꺼내지도 않은 채 인터넷에서 비슷한 검은 티만 잔뜩 시켜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행복했다. 옷이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한 줄은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입어왔을까.
사기죄와 관련해 전화로 출석을 미루고 미루던 피의자 한 분이 오기로 한날. 조사를 시민분에게 쓴소리를 들으며 나의 후줄근한 옷차림은 막을 내렸다. 그 시민분은 사기죄와 관련하여 몇 번이나 다른 사건으로 우리 경제팀을 방문하던 분이었다. 따라서 보통 어색해하고 긴장한 듯한 다른 고소인 분들과 달리 마치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시민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60대가 넘은 고소인은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무작정 자리에 앉으려 했다.
“OOO 씨 맞죠? 나가서 기다렸다가 시간에 맞춰 들어오세요.”
정수기에서 물을 뽑고 있던 나는 서둘러 고소인을 부르면서 멈춰 세웠다. 그러나 고소인은 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였다.
“아니 누군데 앉으라 마라에요?”
짧다면 짧은 3개월의 기간 동안 수많은 고소인 중에서 이러한 모습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에 나는 당혹감에 몇 초간 멍을 때리고는 천천히 답해주었다.
“네? 아니 저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저ㅁㅁㅁ수사관입니다”
“아 수사관님이세요? 난 또 다른 수사관 만나러 온 피의자가 괜히 시비 거는 줄 알았네.”
당황한 나의 답에 그제야 고소인은 별일 아닌 것처럼 일어서 돌아갔다.
이후 조사를 하는 동안 고소인이 일부러 힘겨루기를 하려고 나를 다른 피의자라고 언급한 것은 아닌지란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때문에 1시간 정도의 조사가 끝난 뒤 웃으면서 나는 고소인에게 지나가듯 물어보았다.
“아까 왜 나를 다른 사건 피의자인 줄 알았어요? 내가 수사관처럼 안 생겼나 봐요?”
“생긴 게 뭔 상관이에요 그냥 옷을 그렇게 추례하게 입으니 수사관이라고 생각 못했지. 이 방에 다른 수사관 분들은 다들 예의를 차리고 멋지게 입고 다니잖아?”
인사를 하며 나가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토록 다른 동료들 옷에 대해 언급했던 것에 의미가 무엇인지 다가왔다.
혹시 이번 고소인뿐만 아니라 그동안 편한 옷을 입으며 조사를 해왔던 수많은 고소인, 피의자 분들이 나의 후줄근한 모습에 과연 신뢰를 하고 제대로 답변을 한 건지 의구심까지 들어왔다.
나만 편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입고 다니는 것이 시민분들에게는 전혀 예의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경찰로써 무책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후로 나는 불편할 지라도 지금까지 꾸준히 옷은 신경 써서 차려 입고 경찰서를 간다. 비록 언제까지 이러한 예의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다른 것은 고사하더라도 옷 하나만큼은 꼭 제대로 입기로 스스로 약속하였다.
비록 실내에서까지 옷을 차려입던 과거 조상님들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들이 실내에서 까지 옷을 차려입은 이유가 한순간도 예를 잊지 않으려 하는 기본자세였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하여 수없이 고뇌해야 하는 수사 업무를 하면서 외부 사항인 옷 때문에 사건이 영향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봐야겠다.
매일같이 수사에 임하기전. 나와 타인을 위해 옷매무새에 다듬어야 함을 되뇌이는 그런 하루를 보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