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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Apr 04. 2024

삥 뜯는 원숭이

ㅎㄷㄷ

매주 토요일 아이들이 한글학교에 가있는 동안, 남편은 학교 근처에 위치한 산 아니고 언덕을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한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이 언덕은 부킷티마라고 부르며 해발 고작 163m를 자랑한다. 남편과 같은 속도를 내지는 못하지만 나도 한때 그 길에 동행하곤 했다. 삥 뜯는 원숭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날 우리 부부는 살짝 정글 느낌이 나는 트래킹 코스를 따라 부킷티마 언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려주던 북한산 둘레길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러던 중 갑자기 앞서가던 남편이 멈춰 섰다.

"Uh oh..."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 원숭이 무리가 있었다. 한, 대여섯 마리는 되어 보였다. 야생 원숭이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싸했다. 뭔가를 작정하고 있는 모양새였달까. 비둘기 떼만 봐도 벌벌 떠는 쪼다인 나로서는 그 길을 통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보, 나 여기 못 지나가겠는데?"

이럴 줄 알고 멈춰 섰을 남편이 말했다.

"괜찮아. 내 뒤로 바짝 따라와."

"아, 잠깐. 내게 시간을 좀..."

나는 남편의 옷자락을 붙잡고 뭉그적거렸다. 남편 뒤에 붙어 가는 상상을 해봐도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모를까.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이 우리를 지나쳐 원숭이 무리가 진을 치고 있는 길로 들어섰다. 나는 그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저분들은 안 무섭나 봐. 잘 통과하는 거 보고 지나가자."

그때였다. 행동 대장 원숭이가 공격을 시도했다!

'휘리릭 타탁!'

무방비했던 사람과 원숭이의 대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사람 손에 들려 있던 작은 비닐봉지는 어느새 원숭이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얼떨결에 피해자가 된 이들은 빈 손과 원숭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길 바깥쪽으로 물러난 원숭이는 여유로운 태도로 비닐봉지 속을 뒤졌다.

'부스럭부스럭.'

그리곤 곧 빵을 찾아냈다. 그 장면을 입 벌리고 바라보고 있던 나를 깨운 건 남편이었다.

"당신 손에 든 거 없지? 지금이야!"

남편은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지나가면서 흘낏 쳐다보니 원숭이는 손에 든 빵을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그래, 너도 먹고 사느라 힘들지?'


이 일을 겪고 나서 알게 되었다. 원숭이 무리 앞을 지날 때는 손에 뭘 들고 있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동남아 이곳저곳을 여행해 본 지인들은 싱가포르 원숭이는 순한 편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야생 원숭이들은 휴대폰이나 모자, 선글라스를 훔쳐가 볼모로 잡고는 음식과 교환하자는 협상을 시도한다고. 너무 똑똑해서 칭찬을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이곳 야생 원숭이들도 먹을 것을 찾아 숲을 헤매는 것보다는 사람 삥 뜯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잔꾀를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가 덕담이 된 이 시대에. 아무리 그렇다지만, 창문 열린 집에 들어가 바나나를 까먹고 나온다는 원숭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간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누가 누구의 공간을 침범했는가를 돌아보면 유구무언이다. 야생 원숭이가 겨우 찾은 인간과 공존하는 법이 약탈이라니. 이런 걸 두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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