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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 Apr 16. 2024

나는 옷을 좋아한다

나는 나다운 옷을 좋아한다

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

우리 집은 이렇게 삼 남매이다. 나는 그사이에 끼인 서러움을 마음에 가득 안고 자란 둘째 딸이다.

여느 집이첫째가 딸이고 둘째도 딸인 집들 중 히 막내가 아들인 경우에는 둘째 딸들은  서러움을 한 움큼씩들 먹고사는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다른 집 둘째 딸들도 나처럼 서러웠다고 해서 내가 자라면서 느낀 속상함들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왜냐하면 세상에 나는 나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내 마음도 하나니까.


엄마가 가끔 새 옷을 사 오신다.

거기에는 아빠옷이 있을 때도 있고 언니옷. 남동생의 새 옷이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새 옷을 사 오실 때는 거의 없다.

언니와 두 살 터울인 나는 항상 언니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하니 새 옷을 사주실리가 없다.

시장에 다녀오신 장바구니를 풀다 보면 다들 신이 난다. 나도 내 거 하나쯤은 있겠지 하며 희망을 품고 물건 물건을 꺼내보는데 내 옷은 없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실망이 되고 설움이 올라오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불쌍한 표정을 하고 내 옷은 없어? 하고 물어보는 것이 엄마를 더 미안하게 만들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항상 엄마한테 자존심이 무척 상해있던 나는 또 내 옷은 없지? 하며 앙칼지게 엄마를 쳐다봤다. 그러면 엄마는 그렇지 네가 그 표정을 지어야 내가 할 말이 있지 하는 얼굴로 "저 노무 가시나 봐라. 엄마를 저래 쳐다보는데 뭐가 이쁘다고 옷을 사주노!" 하시며 오늘도 무사히 잘 넘겼다는 안도의 표정을 보이신다.

그럴 때면 정말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분노게이지는 하늘로 솟구쳐 자식을 차별하네. 차별할 거 왜 낳았노. 아니면 차라리 차별하는 걸 인정이라도 해라 하면서 엄마에게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 엄마는 항상 하는 순서대로 내 등짝을 때리며 나를 쫓아내셨다.


항상 있는 일이었다. 저녁에 퇴근하신 아빠한테 내가 전후 사정을 말하면 (엄마입장에서는 고자질이었겠지만). 그러면 아빠는 내 것도 하나 사다주지. 하신다. 그러면 엄마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자는 언니 거 입어야지. 원래 동생은 그러는 거다.

세상에 원래라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는 언제나 그것이 궁금했었다.


어느 날 우리 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예쁘고 특이한 옷은 많은데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아요"

나도 가끔 이상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특이하고 이쁜 옷들은 있는데 은근 조화롭게 입기가 어렵다. 내 옷장의 옷들은 그렇다.

아들의 말을 듣고 며칠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학을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가 내 옷을 살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최대한 나다운 옷을 샀던 것 같다.

남들과 겹치지 않고 세상에 하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옷들을 나는 좋아한다.

언니 옷을 물려 입을 때 헌 옷이라 싫었다기보다 한마디로 내 스타일이 아닌 것을 입어야 하는 것이 더 싫었던 것 같다.

지금도 언니와 나는 좋아하는 스타일이 정말 다른데. 그 어린 시절에도 나는 언니처럼 입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가끔 멋쟁이 우리 둘째 이모가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내가 입을 수 있게 수선해다 주면 나는 그 옷이 너무 좋았었으니까.


우리 아들은 내가 옷을 하나 사더라도 브랜드가 있는 좀 좋은 걸 사길 원하지만 나는 흔히 말하는 보세.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는걸 더 좋아한다.

인터넷 쇼핑몰이라고 해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도 있고 어떤 건 브랜드보다 더 비싼 옷들도 많다.

거기에는 특이하고 예쁜 옷들이 많다.

나는 그런 옷들이 좋다.

언니가 입던 옷을 입고 나갔을 때 어 이거 ㅇㅇ이가 입었던 거랑 같은 옷이네? 하는 언니가 있었다. 그랬더니 옆에 언니가 얘 ㅇㅇ이 동생이잖아. 하는 것이다. 정말 너무 싫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ㅇㅇ이 동생이 아니라' 나' 이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의 무의식이나  의식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의 그런 기억들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구성하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내가 행동하고 생각하니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아들 키울 때를 한번 떠올려 본다.

혹시 내가 그 아이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나의 아들로서만 키우려고 했던 적은 없는지.

아들이 원하는 옷을 못 입게 하고 내가 입히고 싶은 옷을 입힌 적은 없는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미 다 컸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니 그 말에 희망을 걸고  당장 오늘부터라도 아이 자체를 더 인정하며 지지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내 욕심 버리고 내가 원하는 옷 말고 아이가 원하는 옷을 마음껏 입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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