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서 힘들다고 말했더니 차단당했다
이모. 상처받지 마...라는 조카의 한마디가 위로가 되었다.
나에게는 감옥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감옥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가 만들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나오지 않은 것은 아마 나 자신이었을 것이
다.
어느 순간 내가 감옥에 갇혔다 는 것을 알게되었 지만 나는 애써 감옥이 아니라고 그냥 조금 불편 함이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라고 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참고 참고 참다가 근 1년 전쯤부터 표현을 했더랬
다. 힘드노라고. 그리고 기대했다 나의 마음을 존중
해주기를.
하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른척하며. 지금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이 없다. 는 듯이 평소처럼 연락을 해오길래 내가 멀어짐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척하며 같이 멀어짐을 선택
하길래 나는 더 멀어졌다.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 하 는 사이라 내가 챙겨야 하는 부분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니었다. 내가 또 지고 들어온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드디어 큰 마음을 먹고 설명하고 지금의 내 마음을 얘기했지만 예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엄청 화
를 내고 나를 탓했다고 한다. 내가 보낸 문자에는 답이 없었고 신랑이 보낸 항상 우리가 부담하던 친정아빠 제사비용은 수신거부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해마다 그들의 생일과 조카들의 생일을 한
번도 잊지 않고 연락을 하며 챙겼지만 우리 아이 생
일에는 단 한 번도 이모 이모부의 생일 축하문자를 받은 적이 없다. 우리가 유학을 나온 이후로 말이다
언니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유학을 나가는 것을 아
주 못마땅해했다. 물론 멀리 떨어져야 하니 서운한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도가 과했고 항상 우리 아이를 탓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채로 피아노를 쳐야 하는 그래도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조카를 단 한 번도 기특하게 여기거나 가엽게 여긴 적이 없다.
그저 본인에게서 나를 빼앗아 가는 적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나에 대한 사랑이라 여겼으
며 항상 아이에게 이모를 이해하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이었나 아이에게 어른을 이해해 주라니
엄마는 언니와 나와의 관계를 참으로 이상하게 셋
팅해 놓았었다.
언니의 생리대는 항상 내가 사러 가야 되고 나 초등학교 때 비빔면이 처음 나왔었는데 그 오른손 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하는 거 말이다.
어느 여름 방학에 집에서 낮잠을 자는데 ㅇㅇ이 깨기 전에 얼른 먹어라. 하는 엄마의 말소리가 들려
다. 여기서 ㅇㅇ이는 나다.
불행인지 행운이지 나는 잠귀가 너무 밝아서 알람
소리도 울리자 마자 듣고 끄는 사람이다.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그 오른손 왼손으로 열
심히 비빈 비빔면을 언니가 혼자 먹고 있는 것이 아
닌가.
그 순간 어린 나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더랬다. 내
가 과연 눈을 떠야 할 것 인가 그냥 자는 척을 해야 할 것인가
눈을 뜨고 일어나면 물론 비빔면 한 젓가락은 얻어
먹을 수 있겠지만 참으로 눈치 없는 가시나라고 등
짝을 한 대 맞을 것이고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자니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 고민을 하다가 나는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몇 년 전에 언니에게 이 일을 얘기했더니 자기는 기
억 나지 않는단다.
엄마가 세팅해놓은 이상한 관계를 몇 십 년 동안 이어오다가 나는 아주 많이 힘들게 아이를 낳았
고 그 아이에게 집중하는 동안 언니의 행동은 심해
져 갔다. 우리 아이보다 2년 먼저 태어난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첫 조카애를 더 이상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둥.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언니가 번 돈으로 밥 먹고 살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은혜 갚는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음으로 견디고 버텼다. 그러다 9년 전 아이를 데리고 유학생활을 시작 하
면서 나는 아이와 둘이 적응하며 살아내기가 너무 바쁘고 힘들었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이해를 받을 수 없었
고 내가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들을 비난받기에 바빴다.
물론 언니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안다.
코로나 시국에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마스크를
택배를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택배상자에는
항상 딱 내가 주문한 것들만 들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본인의 마음으로 넣은 과자봉지 하나가 들어있지 않았다. 택배비는 당연히 항상 송금해 주었다. 택배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임을
잘 알기에 아이와 내가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갈 때는 이 나라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선물로 가지고 가곤 했었다.
그런데 그들에겐 그건 항상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해줘야 하는 사람이고 언니는
항상 받아야 하는 사람이므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한 번씩 한국에 들어 가면 나는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밖에나가 놀고 싶었다. 왜냐하면 여기는 아무도 없는너무 외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는 오늘 나가고 내일 또 친구 만나러 나
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항상 그걸로 화를 냈었
다. 내 나이 오십이 다되어 가는 데 말이다. 그래서 병원에 간다고 거짓말하면서 친구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래서 1년을 연락을 줄이며 지냈고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는 한국 왔다고 얘기는 했지만 숙소를 따로
구했다고 했다. 아이 일정이 있지만 내가 병원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기에 한국에 무리해서 간것이었
다. 이동시간 빼고 12일 한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3
군데의 대학병원 진료를 보는 것은 정말 무척 힘든
일이었다. 시차적응도 못하고 도착 다음날부터 바
로 금식하면서 검사들을 진행했었다
시간을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고 이제는 내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들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내 딴에는 잘
말했고 한 번쯤은 내가 왜 그러나.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 하고 들여다 봐주길 바랐지만 결과는 보
기 좋게 차단당했다.
조카애 말로는 지 엄마가 엄청 화를 많이 냈다고 내
가 이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조카애가 평생을 엄마한테 끌려다니다가 이제 이모
가 이모 목소리를 내는 게 왜 이기적이냐며.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라고 상처받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 조카의 한 마디에 그동안의 마음 고생한 게 터져
올라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물론 나는 지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다.
언니의 입장은 또 어떨지. 물론 다른 면이 있겠지만 지금은 소통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내 마음 챙기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까지 정말 너무 힘들고 고통
스러웠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의 씩씩한 엄마이고 싶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무대가 커질수록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장애가 정말 우리 아이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씩 힘들어하는 아이를 씩씩하게 자신을 길로 잘 갈 수 있게 도와주려면 엄마인 내가 행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의 동생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힘들게 마음을 먹은 것이다
엄마가 세팅해 놓은 나 말고 나 스스로 만들어가는
나 자신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