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이후 바둑 기사들의 기풍이 알파고처럼 변화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런데 기사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른데 모두가 알파고처럼 바둑을 두는 게 가능할까? 바둑을 둘 때면 성향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수비적으로, 혹은 공격적으로 두게 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건 최근 '특장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펜싱의 모든 상황, 기술을 분석하고 최고의 판단을 내리는 펜싱 기계를 상상한 적 있다. 펜싱이 '몸으로 하는 체스'라면, 펜싱 알파고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펜싱 기계에 가까워지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하거나, 무척 달성하기 어려운 길이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성향이 있고, 그 성향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할 때면 불편함을 느낀다. 이를테면 나는 펜싱을 처음 했을 때부터 수비를 공격보다 편하게 느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부분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되, 자신의 성향에 맞게 스타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제일 잘하는 건 뭐냐? 언제나 할 수 있는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완벽한 펜싱 선수란 없다. 그런 선수가 있다면 항상 15:0으로 이기겠지."
완벽한 펜싱 선수란 어쩌면 내가 상상했던 펜싱 기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수는 없다. 우리가 아는 어떤 선수도 항상 15:0으로 못 이길 뿐더러, 항상 이기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시의 세계에 비유해보면 의미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시란 없다. 각각의 스타일을 가진 좋은 시들이 있을 뿐이다. 심보선, 이원, 김연덕, 황인찬 같은 시인들은 절대적으로 우수한 시인이 아니라 각자의 세계를 구축한 좋은 시인들이다. 그러한 시와 시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
펜싱 선수가 지향해야 할 모델 역시 '완벽한 펜싱 기계'가 아닐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성향을 기반으로 특장점을 개발하고 스타일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의 진화는 기계의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