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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아래 Jul 08. 2022

가족은 내게 무엇을 말해 주나-1

나의 첫 기억은 서너 살이다. 정확한 나이를 기억할 순 없으나 그 때의 장면이 너무나 선명해 가끔 그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곤 한다.

나는 첫째로 태어났고 태어날 때부터 순하고 말이 없었다고 했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남동생은 내 부모를 당황하게 했다. 거칠고 막무가내였다. 순하디순한 첫째를 키우다가 둘째아이를 낳았는데 자신들과 너무 달라 내 부모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엄마는 24시간 남동생을 업고 안고 어르고 달래야 했다. 아이는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의 뒷머리를 움켜쥐었고 내려놓으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엄마는 바라던 남자아이가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는 목수였고 집 안에는 작업장이 있었다. 일꾼들의 삼시 세끼와 세참까지 챙기느라 엄마는 힘에 겨웠고 첫째인 나를 외갓집에 자주 맡겼다.

나의 첫 기억은 그 외가에서 시작된다. 햇살 좋은 오후, 나는 외갓집 툇마루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가 날 찾으러 오지 않았고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우기고 떼 쓸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울면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 할머니와 이모, 삼촌들이 일하느라 바쁜 틈을 타 집을 나섰다. 엄마를 찾아가야지.

한국전쟁 때 가장 안전한 피란처였다는 외가는 첩첩산중에 있었고 우리집까지 아이걸음으로는 갈 수 없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가름할 만큼 머리가 굵지 않았던 나는 무작정 걷다가 길을 잃었다. 그리고는 눈물. 나는 울면서 그냥 걷고 있던 어린 내 모습이 보인다. 초록색 새마을 마크 모자를 쓴 아저씨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길이었다. 어린아이가 울며 걷고 있으니 궁금했겠지. 그는 내게 집에 어디냐, 아버지 이름이 뭐냐, 전화번호를 아느냐 물었다. 나는 아버지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나는 내 부모에게 인도되었다. 그 후로 엄마는 나를 외가에 맡기지 않았다.

남동생은 자주 다치고 부모를 화나게 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음주운전으로 자동차 한 대와 트럭 한 대를 폐차시켰고 가출해서 호프집 알바를 하다가 내 손에 잡혀 집에 들어왔다. 대학 다니던 나는 너를 무시해서 미안하다며, 학교 앞 커피숍에서 그 애한헤 무릎을 꿇었다. 그 애의 가출은 5일만에 내 손에서 끝이 났다.

그 애가 고등학교 시험에 낙방하고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축구 경기를 보고 있을 때 아버지는 마음의 억누름을 통제하던 힘을 잃었다. 아버지가 그 애의 책을 모두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허리 벨트를 풀어 그 애를 때릴 때 나는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해에 나는 대학에 낙방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망을 안겨 주었기에 아버지의 분노가 단지 남동생에 대한 것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애는 내 몫까지 맞았다.

난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부모의 모습을 보았다. 오래도록 그 때 아버지의 이끌거리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부모의 기대를 채워야 한다는 스스로 짊어진 무게감으로 살았다.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피해 다니던 교사의 삶은 어쩌면 부모에 대한 갚음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원하는데, 그렇게 내 부모가 원하는데.

그렇게 교사가 되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대학을 다시 다니고 세상 이치든 뭐든 모르겠다 하고 멋대로 살다가 교사의 삶으로 들어서다니.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교사의 삶이 내게 잘 맞는 일임을 알았다. 돌고 돌아 의도하지 않게 내 몸에 착 맞는 일을 찾아서 나는 부모에게 감사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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