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몸은 비실비실 아프고 노력하는 재능도 없던 남동생은 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다. 아버지와 성격이 맞지 않는다, 일은 힘든데 아버지는 월급을 적게 준다, 독립하고 싶은데 허락을 안 해 준다. 그 애는 내내 힘들다고 불평을 했고 술을 자주 마셨다. 유일한 쉼이 알코올이었으나 엄마는 그렇게라도 옆에 붙여 놓고 싶어 했다. 불안해했고 걱정했다.
그동안 나는 집에 자주 가지 않았다.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보다 묵직한 집의 기운이 부담스러운 게 더했다.
그 애는 자기 맘대로 안 되는 모든 일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 애 언어의 대부분은 남 탓, 환경 탓이었다. 노력하는 것 말고는 내가 가진 게 없다고 믿었던 나는 독하게 살아내고 혼자서 감당했다. 노력이 내 재능이었으므로. 그런 나는 그 애와 어느 때부터인가 말 섞기가 힘들었다. 아는 건 모두 텔레비전에서 본 것뿐인데 세상만사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마다 아마도 내 얼굴엔 냉소가 스쳤을 것이다.
그 애는 날 좋아했는데, 그걸 알고 있었는데 나는 무언가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처럼 그 애를 인식했다.
그 애는 아마도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늘 칭찬받고 늘 칭찬거리를 만들어 오는데 자신은 늘 부모의 걱정을 안아야 하는 삶에서 점점 나에 대한 저항감이 생겼으리라 짐작한다.
나는 어쩌다 한번 말하는 내 언어에 담긴 비난과 나무람을 알면서도 내뱉었다. 그 애는 내 말을 고깝게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성을 높여 싸우지 않았다. 그 애는 나를 무시할 수 없었고 부모에게 면목없는 일을 만들면 상의할 데라고는 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애의 성정은 순종적이고 순했다. 투덜대기는 해도 부모에게 늘 순종했다. 내가 공부할 때 엄마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어린 시절처럼 아버지의 경조사와 집안 묘 관리도 그 애가 했다.
아버지는 그 애가 철이 들었다며 기뻐했고 그 애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행위로 그 마음을 드러냈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서울에 자리를 잡은 후 고향을 잊고 있을 때 그 애는 아버지 옆을 지켰다.
못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옛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 운명 같은.
내가 내 삶을 짊어지고 혼자 견뎌 내기를 선택한 건 잘하지 못할 것 같은 일에 덤비어 들 용기가 없어서였다. 외로운 게 차라리 나았다. 내 삶에 누군가의 삶을 덧대고 거기에 새로운 삶을 책임지는 일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그 애는 비슷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아니 세 사람의 삶을 나는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냥 너희들 색깔대로 살라고. 내 무의식은 끊임없이 그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지혜가 부재한 가족 사이에서 내 개입이 필요해졌다. 아버지는 엄마를 잃고 나서 약해졌고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나를 찾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를 우선으로 두었다. 생활비를 드리고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는 딸은 아들의 뒷전에 있었다. 결국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내가 맡게 될 것임을 아버지께 넌지시 말해도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데 네가 왜 하느냐고 말해 아들을 의지하는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랬다. 오래도록 힘들게 하고 여전히 불안한데도 아버지에게는 아들이었고 생활의 기반이 되는 경제력을 책임지는 딸은 그저 아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기쁨조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자식 자랑이 필요할 때 내세울 수 있는.
나는 오랫동안 돈으로 모든 책임을 져 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명절과 제사에 음식을 차리는 일을 늘 함께 했고 방학이면 일주일씩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그리고는 이제 해방이다, 하고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내게는 사랑보다 책임이 더 힘이 셌다. 내 도리를 다하느라고, 시댁 가는 며느리처럼 명절에 집에 갔고, 동생 아내의 눈치를 살폈고, 애썼다고 용돈을 안겼다.
그 애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재정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그걸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그 애들은 늘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가는데 수렁 속에 빠진 것처럼 삶은 나락으로 한 발씩 떨어졌고 급기야 보이스피싱에 큰돈을 날리고 신용도는 바닥을 쳤다.
감당할 수 없는 빚 앞에서도 아끼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도움을 더 이상 청할 면목이 없어졌을 때 내게 손을 벌렸다.
나는 여기저기 돈을 끌어다가 그 애의 뒷감당을 했다. 대출 한 번 안 받고 가진 것만 갖고 소박하게 살아왔던 내게 큰 빚이 남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돈으로 너에 대한 빚을 갚으마. 아버지에 대한 부양의 책임감을 나눠 갖는 대가로 너한테 돈을 주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만 너를 감당하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제발 연을 끊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