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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아래 Jul 10. 2022

가족은 내게 무엇을 말해 주나-3

막내인 여동생은 말이 없고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기 삶을 이어 가는 아이다. 언니, 오빠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보며 자랐고 나보다는 제 오빠와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늘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집을 떠났으므로 그 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부터는 겨우 몇 달에 한번 얼굴을 보는 게 다였다.

우린 여느 자매와 달리 서로의 근황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애를 아주 좋아한다. 그 애는 내가 어쩌다 전화해서 내 생각을 전하면 말없이 들어주고 어떤 판단의 언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오는 사람을 맞아 주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으며 곁에 있는 사람을 살뜰하게 챙기지 않지만 항상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품을 지녔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어느 날, 교감선생님이 내게 선생님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이다,라고 지나는 말로 평가했을 때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그걸 원해 왔다는 걸 교감이 대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는지 생각했다. 낮에는 늘 긴장하고 그 팽팽함을 혼자의 시간에 느슨하게 해야만 또 내일을 살 수 있었던 내게 여동생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그 애는 그걸 있는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아이였다.

우리집 문제는 내가 나서야 했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건 여동생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 말을 몸으로 말해 주는 존재. 나서는 힘을 쓰지는 않으나 버티는 힘을 가진 그 애가 아마도 가장 오래 살아남는 아이가 될 거라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푹 꺾이고 만신창이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는 그 애를 떠올리게 될 것이라 짐작한다.

그 애는 어느 날 남동생에 대한 내 투덜거림에, 오빠는 언니한테 자격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언니가 무슨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삐딱하게 반응한다고.

남동생이 자신의 재정상황을 해결하고자 할 때, 그 불안함을 뚫고 보이스피싱이 단 칼에 그 애를 베어 버렸을 때, 나는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직감했다. 그런 일에 자신을 들이부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남동생을 비난하는 마음을 꾹꾹 누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비어져 나와 그 애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하고 싶은 말을 백분의 일도 못 했는데 남동생은 그 말 속에서 참고 있는 내 분노와 비난을 읽어 내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여동생은 그런 오빠를 다독였다. 나도 살잖아. 부도가 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묵묵히 감당했던 그 애의 삶을 남동생도 모르지 않았으니 그 말이 마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는 억울하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자신의 선택임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에게 그 선택권을 쥐어 주었을 때, 네 탓이야,라고 말하고 싶을 때, 난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너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그 모든 선택의 순간에 내가 움직였음을 인정한다. 혼자 살게 된 것이 아니라 혼자 사는 걸 선택한 것이고 외면하는 힘보다 나서는 힘이 세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를 위해 선택한 것이다. 내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주머니를 열고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나을 것임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삶의 궤적 어느 순간에 만났던 나의 근간의 경직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누르는 분노, 자기 삶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무거움, 뭐 하나 어긋난 것이 있을 때 재정비를 하고 싶은 욕망, 온전히 평화롭고 싶은 이룰 수 없는 희망.

어쩌면 지우고 다시 시작하기 가장 쉬웠던 게 직장이었을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는 것 같으니 공부로 이룰 수 있는 걸 찾은 거다.

내겐 친구가 많고 그들은 내 경직됨을 품어 안아 주고 오랫동안 곁을 지켜 주고 가족에게 의지하지 못하는 내게 가족이 되어 주었다.

모든 관계는 유기체와 같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한다. 친구 관계는 그렇게 생성했다가 소멸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힘을 내고 있다. 내게는 그래서 친구가 가족보다 더한 마음의 연결을 준다. 이 또한 변화할 것이다.

가족은 내게 심장을 찌르는 아픔을 준다. 그래서 더욱 외면하고 싶었다. 더 아프기 싫다고, 제발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러나 가족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직면하게 해 준다. 떼어 낼 수 없는 존재. 내가 선택해 만든 가족이 없으니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는 원가족은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가? 네가 노력한 만큼 남들도 그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자신이 가진 능력과 하늘이 주는 축복의 폭 안에서 그들이 최선의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인정하는가? 내 기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너 스스로 안달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은 성장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가?

그래서 나는 이제 이 문제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임을 인정하는 지점에 서 있다.

나는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약한 동생들을 외면하고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욕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 언저리에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내 연민이 책임감의 탈을 쓰고 얼굴을 디밀었을 뿐이다. 그게 연민이라고 말하기 싫어서, 그냥 맏이의 책임감일 뿐이라고 말해 버리고 싶어서 스스로를 속였다.

나는 내 가족을 사랑해서 외면하지 않았던 거다.

부와 능력과 하늘의 축복까지 받은 사람들을 목도하면서 그 모든 걸 가지지 못한 내 형제들이 싫었던 게 아니라 안쓰러워서 화가 났던 거다.

평생 사랑만 주다가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며 그런 사랑을 이제는 받지 못하는 내 형제들과 아버지가 나만큼 불쌍해서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거다.

나는 친구들의 사랑과 동료들의 지지와 학생들의 인정으로 엄마의 빈자리를 잘 채워 가고 있는데 그들에겐 혹시 그게 부족하지 않을까 괜한 미안함으로 더 안달해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래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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