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를 깎다가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칭찬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부터 과일을 깎을 줄 알았다. 국민학교 3-4학년쯤? 심지어 꽤 예쁘게 잘 깎았다. 어른들은 신기해하며 내게 감탄섞인 칭찬을 했다. 물론 훗날 난 그 칭찬을 폐기해야 했지만. (예쁜 딸 낳겠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은 것이었다) 그 성역할 고정관념형 멘트때문에 애써 잊으려 하긴 했어도, 과일을 참 잘 깎는다는 부분만큼은 뿌듯하게 간직하고 있었나보다. 어느날 복숭아를 깎다가 기억난 걸 보면.
그러다가 잠깐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다양하게 칭찬받을 꺼리가 있던 때라서 말이다. 심부름을 잘 해서, 친구랑 잘 지내서, 신발장 정리를 잘 해서, 그도 아니면 밥을 잘 먹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시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외부의 칭찬이란 것은 누가 봐도 칭찬 받을 만한 것에 대해서만 기대하는 어른 세상에 익숙해졌었나보다. 내가 오늘 밥을 잘 먹고 정리를 잘 한 것을 타인에게 칭찬받는 어른은 없다. 뭐 사랑에 빠진 연인이나 배우자를 계도하려는 배우자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겠지.
그런데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나를 기분좋게 하고 결국 내 삶을 좋게 한다면, 그 칭찬 내가 나한테 해주면 되겠네 싶다. 평생 나를 칭찬해주는 칭찬러가 하나 생긴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든든하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칭찬 ‘받을 만한 일’이라는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만 하면 말이다. 오늘도 여섯시에 잘 일어나 아들 깨우고 아침 챙겨주고 배웅해준 나, 어제밤 늦게까지 독서모임에 참여한 나, 아침부터 글쓰고 있는 나, 그리고 30년째 복숭아를 잘 깎는 나. 생각해보면 칭찬받을 일은 많다.
(자신을) 아낌없이 칭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또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되는 칭찬의 무한증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