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이란 말이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이란 뜻의 신조어다. 개인 SNS인 인스타그램은 사실 개인적이지 않다. 주말이나 쉬는 날 모처럼 평범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갈만한 곳을 찾을 때, 인스타그램은 검색 엔진이 되어준다. 해시태그에 지역이름과 함께 맛집, 카페, 갈 곳, 핫플 등을 붙여넣으면 추천 이미지들이 주르륵 뜬다.
요즘 인스타그램 해시태그가 부쩍 늘고 있는 곳 중에 ‘팝업pop-up 스토어’가 있다. 소비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제품 홍보를 목적으로 임시로 여는 매장으로,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두 달 동안 문을 열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 부쩍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서, 10-20대들이 많이 찾는 서울의 핫플레이스인 한남, 성수, 청담 등의 골목과 더현대서울에는 현재 오픈 대기 중인 팝업 스토어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 팝업pop up-스토어
스토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 공간의 목적은 판매에 있지 않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그래서 공간은 철저하게 (잠재적) 고객에게 근사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된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찍을 포토 스팟(spot)들, 제품과 연관되는 다양한 체험들이 마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 온라인 식품 유통업체의 팝업 스토어에서는 올리브 오일, 치즈 등의 식품 체험 행사를 기획하는 식이다. 이곳은 브랜드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MZ세대의 SNS 사용행태를 활용하는 공간인 셈이다.
방문자들이 이곳에서의 경험을 사진에 담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해시태그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다.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오픈 시간의 제한이 있다는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찾아갈 결심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한 마디로 팝업 스토어는 이 시대의 문화 현상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브랜드 마케팅 기법이 탄생시킨 상업 공간인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소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익숙해져 왔다. 동네 마트, 백화점, 대형 마트, 편의점, 대형 쇼핑몰, 상업지구 등 시대에 따라 소비 공간의 모습들도 변화했다. 모빌리티 사회로 진입한 이후에는 교통의 발달로 대형 매장, 글로벌 매장이 늘었고, 통신의 발달로 인해 온라인 마켓의 이용도 급증했다.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 행위는 우리의 삶에서 뗄 수 없는 일이기에 이런 공간들에서의 구매 경험 역시 우리가 늘 영위하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팝업 스토어라는 공간은 구매라는 일차적 행위를 넘어서 특별한 ‘경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소비 공간과는 분명 다르다.
장소, 경험, 그리고 무장소(placelessness)
공간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경험’을 하게 해준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특정한 경험을 한다. 그 경험들이 우리의 삶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칠 때, 그곳은 우리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특별한 ‘장소 경험’은 인문학 연구의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특정한 공간 안에 존재하고, 그곳에서의 ‘경험’이 모인 것이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무장소placelessness’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무장소란 말 그대로 장소가 없는 것이다. 이 개념은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가 1976년에 출간한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 저자는 ‘상업적 개발과정에서 개성을 박탈당해 동질적이고 규격화된 경관으로 변화되어, 결국 고유한 장소감을 상실한 것’을 무장소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무장소가 아닌 곳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50여년 전에 탄생한 ‘무장소’의 개념은 그런 경관들에 모두가 익숙해진 지금까지도 공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팝업 스토어는 어떤 장소일까? 그리고 팝업 스토어에서 기업들이 사람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는 ‘경험’은그곳의 방문자 개인에게 어떤 경험일까?
과거의 장소 경험 - 크리스챤 디올의 어린 시절
햇살이 뜨겁던 5월, 친구의 제안으로 ‘디올(Dior) 성수' 팝업 스토어에 다녀왔다. 도슨트의 안내로 매장을 둘러보면서 참으로 낯설고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본다 싶었다. 디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창업자 크리스챤 디올이 태어나 자란 집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 호기심이 브랜드 정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에서 공간연구자들이 말하는 ‘장소 경험’에 대한 좋은 예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05년에 태어난 디올의 생가는 프랑스 북서부의 노르망디 지역 그랑빌(Granville)에 있었다. 대서양과 만나는 해안지방인 그랑빌은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지금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다. 디올의 어머니가 정성껏 가꾼 저택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디올은 이곳에서 노르망디 해변을 내려다보며 다양한 꽃과 나무들로 이루어진 정원 곳곳을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세계 대전과 대공항을 겪으며 그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이 집에서 떠나오게 되었는데, 이후 디올은 자신이 만든 브랜드를 통해 이곳에서 받았던 영감들을 펼쳐낸다. 디올에서 생산한 의류와 향수에는 특별히 그가 좋아했던 장미를 비롯, 그랑빌 저택을 둘러싼 공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저택은 저에게 아주 따뜻하고 감동적인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니, 제 인생과 스타일을 비롯해 거의 모든 것이 그 저택의 환경과 건축방식에서 유래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 디올
디올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창립자 크리스챤 디올의 ‘장소 경험’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장소 경험’은 이렇게 오감을 통해 그 장소의 분위기를 느끼고, 충분한 시간을 거쳐 애착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비록 외부 조건의 영향으로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디올은 20년 이상 이 집에서 살거나 별장으로 드나들며 자랐다.
장소 경험과 정체성
공간연구자들은 우리가 머문 장소와 그곳에서의 경험들은 우리 자신의 자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켜켜이 쌓여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장소’와 ‘장소 경험’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장소 경험으로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명품 브랜드를 만든 디올의 경우는 장소 경험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하나의 사례다.
시간과 공간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간파한 탁월한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나온다. 주인공 마르셀은 어느 날 마들렌을 먹다가,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낡은 잿빛 집’을 마치 ‘연극의 무대 장치처럼’ 떠올린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작은 마들렌 조각의 맛이었다. ...... 그 집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날씨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전에 내가 가야했던 광장, 심부름을 하며 달리곤 했던 거리, 날씨가 좋으면 거닐곤 했던 시골길 ... 콩브레와 그 부근 전부가 마을과 정원과 함께 제 모습을 갖추고 견고해져서 내 찻잔 속에 떠올랐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이 장면에 대하여 철학자 제프 말파스는 '마들렌의 맛이 매개체가 되어 그의 삶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복원을 이룬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것은 마르셀이 존재했던 장소들이, 설령 그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었고, 마들렌의 도움으로 꺼내어진 기억들이 다시 미래의 그가 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한 개인의 정체성인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들의 장소 경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태어난 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사는 일은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집 뿐 아니라 동네, 지역을 떠나는 일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아파트 등의 공동주택이 늘어나면서 자연에서 오감을 자극받으며 살 수 있는 환경과도 멀어져 가고 있다. 이런 시대의 ‘장소 경험’은 과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핫플레이스를 검색해 팝업 스토어라는 공간에서 체험을 하고, 디지털 공간인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서 여가를 즐긴다. 또는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까운 공원을 찾는다. 주변에 산과 바다가 있으면 아주 좋다. 또 어떤 이들은 레포츠를 즐기러 마땅한 장소를 찾아가기도 한다. 시간이 조금 더 허락되면 강화, 양평, 고성, 여수, 부산, 제주도 등 전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가끔 해외여행을 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장소에서의 경험을 할 수는 있지만, 오래 이어지기는 어렵다. 여행자로서의 짧고 강렬한 장소 경험이 간혹 이루어지는 그런 삶이 아마도 대부분의 현대 도시인의 삶 아닐까 싶다.
교통의 발달로 갈 수 있는 곳은 늘었지만, 또한편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의 세계를 통해 움직임이 줄어들기도 했다. 온라인 세상에서 간접 경험을 하고 이것이 바깥세계로 확장되어 직접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핫플을 찾는 경험, 팝업 스토어에서 한 체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경험, 그리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를 어떻게 이루어가는지 지금 당장은 잘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일 뿐 아닐까 싶다.
이러한 시대를 ‘초근대성(supermodernity)’이라고 표현한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에 의하면 이 초근대의 장소들은 ‘고독한 개인성, 일시성, 임시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 역시 급변하는 지금 이 21세기를 새로운 인류학이 탄생하는 시기로 본다. 화려함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얼마큼은 고독한 개인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는 어떤 장소 경험을 하고 있고,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변화의 한 가운데에 있는 21세기를 나름 능동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바램을 품고서.
*참고 도서
-제프 말파스 <장소와 경험>
-마르크 오제 <비장소>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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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근영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30대와 40대 초 타국과 타지역에서 거주하며,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족의 주부로 살았습니다.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지금, 다양한 공간을 넘어 다니며 의문을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사람들, 장소들과 친밀한 경험을 나눕니다.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그 소중한 경험들과 그로부터 배운 삶의 가치들을 글로 쓰고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