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실천으로 옮기기 전 시행착오를 줄이고 싶다면 경험자의 이야기에 기대어 보는 것도 방법이다.
필자는 통번역대학원에서 2년간 공부하고,
현재 한 제조업체에서 중국어 통번역 업무를 하고 있는 현직자로서 개인적으로 느낀 통번역사에 적합한 성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아직은 햇병아리 수준의 경험자이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회고하는 글과 과정 속에 있을 때 나오는 감상은 다르기 때문에
지금 내가 느끼는 점들을 기록해두려 한다.
아래는 내가 통번역 공부를 하며 느낀 통번역사들이 갖추어야 할 소양,
혹은 내 주변 통번역사 동료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특징들이다.
1. 언어 공부에 욕심이 있는 사람
당연한 이야기지만 언어 공부를 순수하게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에는 자연스레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 체크해보기
- 언어는 생각과 감정을 담는 그릇으로, 공부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 평소 책을 읽는 것 혹은 시사 뉴스를 듣는 것에 관심이 많다.
- 모르는 어휘를 보면 호기심이 생기고, 검색해서 확인하고 넘어가는 습관이 있다.
- 맞춤법에 유의하며 언어생활을 하는 편이며, 언어를 선택하는데 남다른 예민함과 섬세함이 있다.
-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좋고, 글을 잘 쓰고 싶다.
-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전달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감이 있다.
위의 설명을 들었을 때, 본인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면 통번역사가 되는 모습을 한 번쯤 상상해봐도 좋을 것 같다.
2.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탄탄한 모국어 실력의 겸비, 다양한 방면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집념
통번역사가 되려면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중 통번역사면 중국어를, 한-영 통번역사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면,
중국어를 원어민처럼 잘한다고 해서 뛰어난 한-중 통번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국어 구사를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며, 배경지식의 폭은 통역의 질을 크게 좌우한다.
보통 통번역대학원 졸업 후의 진로는 아래와 같이 다양하다.
A. 인하우스 통번역사 (기업체에 소속되어 통번역 업무를 하는 형태)
: 법률, 의료, 기술 등 특정 분야의 전문 통번역사로 성장이 가능하며, 월급쟁이인 만큼 프리랜서보다는 비교적 수입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 다만, 대기업 등 많은 기업체에서 2년 계약직 형태로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업무 특성상 통번역사들도 일반 정규직 사원보다는 통번역에 집중할 수 있는 이와 같은 형태를 선호할 때가 많다.
B. 공공기관, 공기업, 국제기구, 외교행사 통번역사
: 외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통번역사들도 많이 있다.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격식 있는 자리에서 통역을 하거나 중요한 문서를 번역하는 기회도 잡을 수 있겠다. UN에서 동시통역을 해보는 것이 꿈인 통번역사들도 많이 있다.
본인이 하는 일이 공공의 업무와 관련되니 자부심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압박감은 당연히 조금 더 느낄 수 있다.)
한중 정상회담이 개최될 때 뉴스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동시통역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통역사의 긴장된 호흡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은데,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으로 어휘를 고르고뉘앙스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B. 프리랜서 통번역사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형태)
통번역의 범위가 다양해서 거의 공부가 취미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번 주에는 보험 관련 통번역 문의가 들어올 수 있고, 그다음 주에는 영화 관련 통번역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매번 새로운 주제의 회의가 주어지면, 사전에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까지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장점은 배경지식을 확장할 수 있고 본인 능력에 따른 고수익 창출이 가능한 것이지만, 지식의 범위가 넓은 것에 비해 깊이는 다소 부족할 수 있고, 성수기와 비수기가 구분돼 수익이 불안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C. 언어 능력을 스펙으로 삼아 취업 및 창업
외국어 활용이 높은 직무나 글로벌 투자, 해외 영업 등 직무에 도전한다면 플러스 요소가 될 수 있다. 언어 능력과 배경 지식을 창업 아이템으로 사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D. 교육직 종사 (학원 강사, 교수 등)
언어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종사자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본인이 잘한다고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므로, 교육에 뜻이 있어야 하고 많은 고민도 필요하겠다.
E. 방송, 행사, 출판/영상 관련 통번역사
외국어 라디오 DJ,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 통번역사, 각종 포럼의 이중언어 MC, 해외시장 홈쇼핑 MC, 아나운서 등의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출판 및 영상 번역가(최근 예능, 다큐 등 방송 쪽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도 도전해 볼 수 있다.
F. 기타
3. 조직에 소속되기보다 본인만의 전문성으로 개인 가치를 높이고 싶은 사람
대규모 통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협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다른 업종 대비 비교적 개인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불안감과 고독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것을 일종의 설렘과 자유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려해봐도 좋을 직업이다.
COVID-19와 인터넷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근무 형태가 각광을 받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재택근무를 진행하게 돼도, 공간 및 시간의 조정이 자유로워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직업군인 것 같다.
4.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
통번역은 하루라도 연습을 안 하면 본인이 바로 느낄 수 있다고들 한다. 통번역사를 '백조'로 많이 비유하는데, 물 위에 떠 있는 우아한 백조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물아래에서 쉴 새 없이 발을 젓고 있는 운명을 갖고 있다.
시역(텍스트를 눈으로 보고 바로 통역) 스터디, 노트 테이킹(들은 내용을 통역하기 편하게 자신만의 기호로 필기) 연습을 꾸준히 해서 입과 손을 풀어줘야 한다.
좋은 글을 찾아 읽어야 하고, 좋은 톤과 발성으로 낭독 연습을 하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결국 치열한 통번역 시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5. 통역은 '순발력'과 '순간 집중력', 문서 번역은'집요함'과 '꼼꼼함', 문학 번역은 '뉘앙스'와 '문학적 감수성'
통번역이라고 다 같은 특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통역, 문서 번역, 문학 번역을 떠올렸을 때 위와 같은 키워드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적은 것 외에도, 통번역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정답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경쟁력으로 만들어, 각자 개성 있는 통번역사가 되면 되는 거 아닐까.
필자도 통번역대학원 전까지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이 공부와 맞닿아 있는 건지,
인풋이 큰만큼 아웃풋이 존재하는 길일지......
다만 통번역대학원에서 언어의 홍수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졸업을 할 때쯤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했던 2년의 시간은 나를 성장시켰고, 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분명 엄청난 자산이 될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통번역 공부는 분명 그대를 더 넓고 멋진 세계로 인도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