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기억
내 삶은 지질함의 연대기다. 과거의 나는 질리도록 지질했고 현재의 나 역시 여전히 지질하다. 이토록 끈기 있게 지질한 내가 나는 정말 애틋하다. 나의 과거는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주변 상황을 보지 못해 지질함에 계속 매몰된 과거와 달리 현재의 나는 지질함을 친구 삼아 주변 상황을 즐기는 여유를 갖게 됐다.
옷장을 뒤지다 보면 무모했던 내 과거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나를 흠칫하게 한다. 성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납작한 가슴에 억지로 클리비지(cleavage)를 만든 두툼하고 딱딱한 패드를 덧댄 플라워 프린트 브래지어, 살과 알통으로 단련된 올록볼록한 다리를 아낌없이 보여준 마이크로미니 커팅진, 짧은 다리는 숨겼지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감출 수 없었던 위험천만한 킬힐.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지질한 나만의 패션사가 버려지지 않고 생생한 현재로 내 공간에 남아있다.
패션계에서 통용되는 진리로 여겨지는 말이 있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는다. 옷을 사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옷에 맞춘다. 옷을 입다 보면 정말 이건 나한테 아니라고 생각했던 옷이 어느 순간 자신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게 된다.
얼리 어답터(early adapter)도 아닌 팔로우(follow) 층으로 헉헉거리며 ‘패션 피플’이 되지 못한 ‘패션 빅팀’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이런 나도 오랜 시간 무모한 시도를 무한 반복하다 보니 나도 옷에 맞추는 경지에 근접했다.
과거 옷들은 당시 나의 결핍을 품고 있고, 결핍들을 극복하기 위한 내 선택들이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다. 현실에서 도피한 과거의 공상, 공상에서 빠져나와 허우적대며 저질렀던 과거의 무모한 시도들은 끊임없이 재생되며 현재의 나를 단련한다.
누군가는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라고 하지만, 현재는 과거의 재생이다. 재생은 과거의 100% 재현이 아니다. 재생되는 과거에는 현재의 욕구가 덧칠된다. 과거와 같아 보이지만 실은 매 순간이 다른 가공된 재현이다.
현재성은 과거를 자원 삼아 미래를 위한 또 다른 과거로 축적된다. 과거의 지질한 나는 추상이 아닌 옷의 기억과 연결돼 형태 묘사가 가능하다. 이처럼 실체가 있는데도 복제하듯 재생되지 않는다.
나의 지질함에 질식할 지경일 때 무모한 시도를 하던 내 옷들은 현재의 나를 괴롭히는 괴물이었고, 지질함과 친구가 된 지금은 같은 옷들이 나를 성장하게 한 신의 선물처럼 생각된다.
공상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지질한 과거의 기억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생된다. 그러나 재생된 기억의 색은 매 순간 달라진다. “기억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며 의지가 가해진 창조”라는 작가 토니 모리슨의 말처럼 현재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