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균열 Jul 03. 2020

004. 진정한 대화란 무엇인가; 미하일 바흐찐

현대사회 속 타인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

물질의 변이, Photograph by Yi (2020)

존재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과정. 타인과 만나서 살을 부비는 것. 대화란, 나의 삶을 움직이는 어떠한 힘이 수반돼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분자화되어 대화가 나의 존재를 '각성'하는 게 아니라, 그저 우리의 불안을 채우고, 안일하게만 만드는 작업의 연속으로 이뤄지고 있다. 진정한 '대화'라는 건 두 존재가 상정돼야 하는데, '나'도 제대로 존립하지 못하고 '타인'도 제대로 존립하지 못하면, 그저 체제 내에서 끝없이 잘못된 것을 재생산하는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이로써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대화는 부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안정된 사회 내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늘 타인들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지배적 리듬 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오늘날의 현상을 본인만의 건강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대화는 '공식적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직장에서 회의할 때, 학교에서 선생님 혹은 교수님을 대할 때, 가정에서 부모님을 대할 때 등 우리가 내뱉을 수 있는 말들은 한정되어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한 명의 주체로서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공식세계 내에서 벗어나 진실된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창출하려는 말을 하면, 타인에게 불쾌함을 야기하고, 따라서 타인은 이러한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 한다.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일상의 양식을 바꾸는 것은 실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쾌함이야 말로 실은, 진실로 가는 도화선이다. 저 세계와 이 세계에서의 서로를 움직이는 힘이 대화지, 이 세계 끼리의 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현재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엇나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나의 움직임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서로를 통해 확인하고, 망각하기 위해 서로를 향한 안정제를 투여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생의 균형, Photograph by Yi (2020)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자신이 유일하다고 서명하는 것부터 대화의 시작이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겐 그러한 시간이 없다. 삶을 관조적으로 살고, 무기력하게 산다. TV와 인터넷과 같은 매체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든 늘어지게 함으로써, 개인에 대한 혹은 세상을 향한 시선을 드리우지 못하게 만든다. 늘상 같은 말들이 매체를 통해 순환되며, 이러한 말 속에는 서로를 향한 직접성이 결여돼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각은 직접 살을 부딪히는 것보다 간접적인 것들을 좋아하게 길들여졌다.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 단절된 세계 속에서 허황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유일한 개인과 유일한 개인이 만나 새로운 것을 생성했을 때, 그게 비로소 대화가 된다. 계속 말을 걺으로써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표출하고, 이를 주고 받았을 때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 그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아닌 진정한 대화 속에서 나 자신을 진실되게 살피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대화란, 개인과 개인이 상호 침투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각성하는 것, 또한 이에 따르는 일련의 책임까지 감내하는 것을 일컫는다.이처럼, 지배된 감각에 상처를 내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따라서 항상 불편하다. 기존의 체계에 상처를 내고, 우리가 병들어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예술가는 개인의 생활에 침투해 기계적 감각의 체계를 박살냄으로써 반기계적이고 인간적인 층위로 격상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해야 하고, 생활인은 그 상처난 감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원인을 예술을 통해 대화적으로 물어야 한다. 하지만 예술인과 생활인이 서로와 독백적 세계에 살고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술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따라서 예술로써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한다. 이는 인식하는 자의 책임이며 예술의 실천적 역할이다. 그래야만 대중의 새로운 생활이 창달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003. 사실상의 미학; 앙드레 바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