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받았던 용돈은 하루에 500원이었다. 받으면 불량식품을 사 먹기도 하고, 집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사 먹거나, 유희왕 카드 한 팩이 딱 500원이었으니 그것을 사기도 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소소한 재미를 충족시키기에는 적당했다.
하지만 학교 앞 문방구에서 야심 차게 내놓는, 주인아주머니가 한 번에 딱 하나 내지 두 개씩만 가져다 두는 간판스타를 가질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싸구려 무선 조종 헬리콥터나 자동차, 또래 친구들 몸 크기만 한 비비탄 총 같은 것들. 가끔의 큰 재미보다는 매일의 소소한 재미를 추구하던 한자리 나이의 나는 그런 것들에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랬다, 그렇게 미치도록 가지고 싶었던 그놈, 요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요요의 자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무슨 고급 시계처럼 투명 아크릴 상자 같은 것에 포장되어 있었고, 빛이 반사되면서 반짝거리는 때깔이 아주 예술인 놈이었다. 가격은 5000원이었고, 하루 500원 받는 나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놈이기도 했다. 엄마한테 땡깡도 부려보고, 11월인 내 생일 생물을 미리 달라고도 떼도 써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하루에 500원이던 내 용돈을, 주말에는 못 받았으니 평일 10일, 2주 동안 모아서 사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2주 동안 항상 있어 왔던 하루의 소소한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엄청난 결심을 요하는 도전이었다.
시작은 항상 호기롭다. 500원 동전이 내 보물상자였던 플라스틱 필통에 한 개, 두 개 들어있는 모습을 보면 금방 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스폰지밥이 그려져 있던 쫄쫄이, 등하교 때마다 맡게 되는 떡볶이의 향기, 그리고 매대에 쌓여있는 피카츄 돈까스의 유혹은 어린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렇게 1000원, 2000원을 모았다가도 금방 줄어들었고, 충동적으로 좋은 카드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 유희왕 카드를 2~3팩 사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모으기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한 번, 딱 한 번 우여곡절 끝에 3000원을 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 옆집 아주머니였나, 엄마가 하던 목욕탕 손님이었나, 용돈으로 1000원을 주셨다. 순식간에 4000원이 모인 것이다. 나는 다음날 등교를 하면서도, 하교를 하면서도 분식집을 쳐다보지 않았다. 유희왕 카드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오직 오늘의 500원과 내일의 500원만 받으면 바로 요요를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음날 나는 문방구 아주머니에게 당당히 500원 동전 8개와 1000원 지폐 1장을 내고 요요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요요를 산 이후는 딱히 생각이 안 난다. 뭐 몇 번 가지고 놀다가 늘 그랬듯 질려서 어디 처박아 놨겠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1000원을 가진 꼬마와 4000원을 가진 꼬마 중에, 떡볶이와 피카츄 돈까스와 유희왕 카드를 사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500원짜리 동전을 플라스틱 필통에 넣는 사람은 4000원을 가진 꼬마인 것이다.
그 꼬마는 약 20년 뒤에 석사를 졸업했고,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4년의 긴 과정이다. 5000원을 모으기만 하면 요요를 살 수 있던 그때와는 다르기는 하다. 어쨌든 새로운 긴 여정을 시작했고, 어떤 연구를 해야 하는지, 내가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 요요가 뽐내던 자태가 떠오른다. 얼마 전에는 박사과정 자격시험을 한 번에 합격했다. 준비하는 과정은 내가 얼마나 지식의 깊이가 얕았는지, 뭘 모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식한지를 깨닫는 시험이었지만 뭐, 아무튼 통과했다. 어차피 항상 그렇듯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겠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인사는 꼬박꼬박 하던 아주머니가 주셨던 1000원처럼, 운과 도움도 필요하겠지. 나는 그저 몰입하고, 몰입할 뿐. 20년 전과 크게 다를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