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 바나네
#. 해남 청무화과
어렸을 적 초등학교를 다닐 때
수업시간에 보여준 단편 만화가 있었다.
지금도 짧게 짧게 기억날 만큼
독특했던 만화였다.
등장인물이 모두 그림자 같이
검은 모습에 옆모습만 보이는,
벽화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중간에 나오는 독특한 악기 소리와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처음 들어보는 언어가
알록달록한 만화만 보던 나에겐
굉장히 낯선 만화였다.
눈을 끄게 하는 화려함도 없고
예쁜고 멋있는 얼굴도 없는
이상하고 요상한 만화였지만
커서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 깊었던 건
그 이야기에 나오는 과일 때문이었다.
반짝이는 별과
주인공의 집과 같은
커다란 무화과나무,
그 나무에 열린 동그란 열매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는 여왕.
여왕을 만나고 싶던 소년의 꿈에
여성의 얼굴 같은 별자리가 나오고
그다음 날, 겨울이지만 나무에는
잘 익은 열매가 열려 하루에 하나씩
여왕에게 진상하는 이야기인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무화과 소년(1999)'이라는 만화다.
검고 큰 나무에 맺힌, 커다란 물방울 같았던
열매의 모양과 여왕이 좋아하며 먹는 부분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면서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무슨 맛일까 정말 궁금했지만 그땐
지금처럼 계절과일로 소비되는 때가 아니어서
먹어보진 못하고 홍시와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었다.
독특한 그림체가 주는 낯섦,
신기했던 불어와 함께한
나의 첫 무화과에 대한 기억이다.
시간이 흐르고 이 일을 하면서
여러 과일을 먹어볼 수 있었는데
무화과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만화에 대한 기억이 몽글몽글 떠오르면서
진한 달콤함을 기대하며 먹었던 첫 무화과는
밍숭맹숭을 과일로 표현한 것만 같은
이도 저도 아닌 맛이었다.
몇 년 사이에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몇 번 더 먹어봤지만 그렇게 매력 있는
과일이라곤 생각되지 않아서
취향에 맞는 과일이 아닌가 보다 하곤
이후로 잘 먹지 않았다.
그러다 좋아하는 파티세리에서 흑무화과와
청무화과를 사용한 타르트를 먹어보고는
정말 맛있어서 ,그때 부터 무화과에
매력을 알게 됐다.
입안에 느껴지는
진한 당도와 쫀득한 식감
은은하게 풍기는 부드러운 향
진한 무화과의 맛에
신기하게도 어릴 때 봤던 만화의
무화과나무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여왕이 먹던 무화과의 맛이
이런 맛이었구나 하는,
어렸을 때의 오랜 궁금증이
톡 풀리는 그런 맛이었다.
이번 가을이 시작될 무렵
슬슬 보이는 무화과에
문득 '무화과소년'이
생각났고 오랜만에
다시 본 만화는 어렸을때 같이
낯설거나 무섭지 않았다.
처음듣는 언어는 이젠 알수 있는
불어였고, 검은 그림체와 붉은배경
그 사이사이에는 어릴땐 느낄수 없는
멋이 담겨 있었다.
반짝이는 별 사이,커다란 검은나무
물방울같던 작은 열매
단순한 그림에 숨겨진 섬세함
다시 봐도 좋았던 만화에는
여왕의 무화과의 맛을 상상했던
어렸을때의 내 모습도 담겨있었다.
이제는 어떤 맛인지 알지만
그때의 내가 상상하던 여왕의 무화과를
담아 진한 무화과 맛이 담긴
과자를 만들고 싶어졌다.
고민끝에 해남에서 재배되는
청무화과를사용한 과자를 만들기로 하고
작업노트에 구성을 짰다.
秋, 바나네
주문한 무화과는'바나네' 라는
품종이었는데 일반적인 홍무화과보다
크기는 작지만 당도와
무화과의 향이 더 진하다.
부드럽고 찰기 있는 식감이
매력적이라 진한 무화과 맛을
표현하기 좋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청무화과를 굴려가며 굽고
버터를 녹여 글레이징 하며
향을 더하고 하루 동안 넣어둔다.
진한 풍미의 마다가스카 르빈을
넣고 잘 섞어준 후 원하는 틀에
넣어 굳혀 인서트를 만든다.
무스는 무화과와 사과 시나몬이 블렌딩 된
루이보스 티를 우려 베이스를 만들고
최소한의 설탕만 넣어 단맛을 줄여
무화과의 단맛이 잘 느껴지도록
균형을 맞춘다.
피스타치오는 캐러멜에 굳혀
믹서로 갈아 프라린으로 만들고
화이트 초콜릿과 우유를 넣어
나멜라카 크림을 만든다.
씹는 식감을 위해 바닥은
크럼블과 포요틴을 사용해
크루스티엉을 만들고
안에 밀크 초콜릿을 사용한
피스타치오 가나슈를 넣는다.
크루스티엉 가나슈 나멜라카크림
무화과 무스 순으로 쌓아 올리고
마지막에 세이지와 청무화과를 올려
마무리한다.
연한 갈빛
녹빛의 풀
은은하게 빛나는
둥그런 무스
주홍빛을 품은 청색열매
여왕의 무화과를 상상하며 작업한
가을의 과자 秋, 바나네
2021.10月
해남 청무화과, 그리고 피스타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