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비우려고 만났는데, 왜 더 채워진 것만 같죠.
* 본 일기는 주로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느꼈던 1인 가구인의 고난기가 담겨 있을 뿐, 셀프 인테리어의 공정 팁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께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함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의장'은 여의도 셀프 인테리어 장인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 단어를 지어주신 노난 작가님께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셀프 인테리어를 시작하기로 한 후, 제일 먼저 나에게 다가온 큰 관문은 바로 기존 세입자가 꾸려 놓은 모든 걸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 세입자는 모르는 할머니셨는데, 이 공간에서 오래 사신 덕분에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벽에 망치로 박아놓은 수십 개의 못, 정수기의 흔적, 상부장이 무너져 버렸는데도 고치지 않고 10년은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싱크대와 신발장, 때가 가득 타버린 주방 후드, 썩어버린 문지방까지.
할머니는 벽에 많은 걸 걸어두고 사셨구나, 정수기를 쓰셨구나 얼굴도 뵌 적 없는 할머니의 삶을 추측하는 것 또한 재미였지만, 재미고 나발이고 전 이것을 철거해야 산다고요. 엉엉
철거 업체를 알아보는 건, 마치 전화로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것과 같았다.
"여보세요. 여기 여의도 00 아파트인데요. 다용도실 문, 신발장, 문지방, 주방 후드 4개 철거되나요?"
"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 그냥 얼마 정도 받는지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 그 정도 철거면 50만 원입니다. -> 좀 더 싸게는 안될까요? -> 5만 원 빼드릴게요.
이런 비효율적인 전화를 3번은 돌리고 나서야, 내가 없애고 싶은 부분은 철거하려면 약 30~4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테리어가 끝난 지금에서 보면 아주 코 묻은 돈이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던 나에게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철거 비용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또한 철거 일정들이 밀려 방문하려면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 또한 좌절이었다.
"후. 그냥 내가 뿌실까. 신발장 정도는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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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이런 고민을 하던 중, 현장(이자 나의 집)에 이케아 철거 기사님이 방문하셨다. 이케아에서 주방을 풀로 맞출 경우, 회사 차원에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기존 주방을 철거할 수 있도록 프리랜서 철거 기사님을 직접 연결시켜준다. 양손에 연장을 들고 방문하신 기사님을 마치 신기루 아니 구세주 같았다. 나는 구구절절 나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기사님 방문주 셔서 너무 감사한데, 제가 신발장/주방 후드/문지방/다용도실 문도 철거해야 하는데, 너무 지저분한데, 다른 기사님들이 너무 바쁘다고 하셔서 일주일 뒤에 오신다던데, 저는 내일 안으로 철거해야 샷시도 들이고 다른 곳도 수리를 할 수 있는데, 제가 직접 철거하는 생각도 해보긴 했는데, 무튼무튼 주방 철거 끝내주시고, 추가 비용 드릴 테니 혹시 다른 부분 철거도 안될까요. 무리한 부탁일까요. 그럴까요.
"네. 그러세요 그럼."
구구절절 나의 이야기에 비해 기사님의 대답은 심플했다. 손에 연장 하나를 들고 주방부터 다용도실 문까지 철거를 해주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시끄러운 철거 소리가 왠지 통쾌하게 들렸다. 철거하시는 모습을 한참 감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사님께서 말을 건네셨다.
"이케아 주방 하셔야 하니까, 수전 설치까지 잡아드릴게요. 근데 인테리어 직접 하는 거예요? 그럼 일로와 봐요. 수전 설치 직접 알려드릴게. 직접 보고 배워야, 나중에 이사 가서도 나 같은 사람 부르지 않고 돈 아낄 수 있잖아요."
기사님은 수전 설치를 할 땐, 고무를 몇 번 감아야 하는지, 유의할 점은 무엇인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심지어 까먹을 수 있으니 동영상 촬영도 꼭 하라고 말씀 주셨다.
"이런 거 사실 별 거 아니에요. 근데 요즘 업자들은 별 것도 아닌 걸로 비싼 돈 부르고 이거 해주지. 앞으로 직접 해요. 지선님도 할 수 있어요."
와! 내 이름을 그대로 불러주시네. 그것도 지선 씨가 아니라 지선님? 와.
인테리어 하는 기간 동안 내 이름이 불렸던 적이 있기나 했던가. 사실 인테리어로 여러 업자 분들을 만나는 기간 동안 나를 부르는 말은 단 하나였다.
"사모님, 사장님은 어디 계세요?"
"사모님은 잘 모르실 수 있으니, 사장님한테 말씀해보셔요."
사모님? 그리고 뭐 사장님? 30대 초반 여자가 벌써 사모님 소리를 들을 일인가? 나는 미혼인데? 심지어 아기도 없는데? 그리고 뭐 사장님? 혼자 사는 1인 가구 집에 사장님이 어딨는가. 그리고 남편이 있다한들 이곳은 내 집인데 내가 사장님인 게 맞지 않겠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모님이란 말은 나를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호칭이었나 보다. 그런 호칭을 내려놓고, 나를 이름 그대로 불러주다니.
기사님과 나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사님은 출판업과 교육 영업 쪽에서 근무하시다가 1년 전 철거를 전문으로 하는 일로 진로를 바꾸셨다고 한다. 회사를 다닐 때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벌 수 있는 돈에 한계가 있었는데 진로를 바꾸고 나서는 하는 만큼 벌 수 있어서 너무 뿌듯하다고 하셨다.
"제 나이가 60이 다 돼가요. 아들이야 걱정하지. 근데 60이 넘어서도 이렇게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난 전문직이니까 내 맘대로 일해요.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또 일하고 싶지 않은 날엔 일 안 받아요. 정말 행복해."
그래, 의사 변호사만 전문직인가!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다 전문직이다. 마! 철거 선생님이야말로 노장의 전문가였어!
주방, 다용도실 문, 문지방, 신발장, 주방 후드, 벽에 박힌 못 등 원하는 대로 철거 공사가 마무리됐다.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에어컨 없이 일만 했던 기사님은 목이 타시는지 내게 아파트 건너편 편의점에서 음료수 한 잔을 권하셨다.
우리는 건배를 하면서, 완벽한 철거를 자축했다. 이제 셀프 인테리어의 한 발자국을 뗀 나는 걱정이 앞섰다.
"기사님, 근데 이제 겨우 철거를 시작했을 뿐인데 너무 걱정이네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살아보니까, 인생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인테리어밖에 없더라고요. 근데 이미 잘하고 있잖아.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인생도 인테리어랑 같아. 열심히 살아요. 결과는 시간에 맡겨요."
오늘 세상 처음 보는 분께 나의 집을 맡겼네. 인생도 배웠네.
비우려고 만난 철거 기사님께 응원과 위로를 꽉꽉 채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