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크리에이터가 만들어가는 도시
조선시대 제주읍성의 흔적은 지금도 도로의 형태로 남아 있고, 남문로터리 인근에서는 일부 복원도 되어 있다.
제주에서 정치, 행정,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중심이 되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행정, 교육 등 중심 시설의 이전으로 경제적인 기능도 분산이 되어 지금은 중심지의 흔적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제주시 원도심은 중심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청, 도청을 원도심으로 이전하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각종 공기관들을 이전시킨다면 유동인구는 늘어날 것이고 다시 한번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중심시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지역의 거의 모든 발전이 중심시설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중심이 여러 개가 생겼고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금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전제조건이면서도 가장 큰 장점이 제주시 원도심에 있다. 바로 도심의 저밀도 유지와 있는 문화재의 활용이다. 즉 제주시 원도심의 도시 공간적 특성을 잘 살려야 한다. 이제까지 유지해 온 원도심의 밀도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고밀도화하여 지역이 가진 가장 강력한 특징을 지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도시계획상으로 제주시 원도심은 상업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어 고밀도의 개발이 가능하다. 하지만 제주목관아 등의 문화재가 있고, 전통시장이 여러 곳 있어서 도시정비사업을 하기에 굉장히 복잡한 소유관계가 있고, 사실상 고층 임대가 어려워 개발 이익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고밀도로 재개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변화에 대한 고민 없이 지금 이대로 도심을 유지하면 제주시 원도심은 어떻게 될까. 현재 제주시 원도심에 가장 많은 유동인구를 유치하는 곳은 동문시장이다. 하지만 대부분 차를 이용하다 보니 주변에 미치는 경제 효과가 미미하다. 동문시장을 이용한 소비자가 횡단보도 하나 건너 칠성통이나 산지천으로 유입되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동문시장 외에 유동인구를 유발하는 다른 시설로는 제주목관아가 있지만 영향력이 미미하다. 지역 발전을 위한 계기가 없다.
제주시 원도심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 저밀도의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여러 가지가 있다. 제주시 원도심의 낮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풍경은 강력한 도시 브랜드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뜨고 내릴 때의 제주시 원도심의 풍경은 정말 훌륭하다. 도시의 저밀도 스케일은 걷기 좋은 환경이다. 한라산 방향으로 경사가 있기는 하지만 도심 안에서 하나의 목적지를 가는데 걸어서 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런 도시 환경에 어울리는 접근 방식은 스몰 비즈니스 또는 큰 기업의 분산형 입주 방식이다. 소상공인들이 많이 입주해 있기도 하지만 유동인구를 발생시킬 매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원도심은 창의적인 경제 활동을 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스타트업 등 스몰 비즈니스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모이고 연결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필자가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센터장이었던 2017년에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도시재생전략포럼과 함께 전국의 스타트업들을 초청해서 의미 부여를 했던 이유다. 그리고 지금은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지역을 이끌고 있다. 로컬 콘텐츠를 활용하여 라이프스타일 관련 사업을 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여럿 자리를 잡고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유동인구를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현 정부에서는 과거 균형발전위원회를 지방시대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지방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정책 중 하나가 로컬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고 지역을 로컬 콘텐츠 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원을 하고 있다.
도시를 발전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제까지는 도시를 고밀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토건산업을 통해 자본이 여러 산업으로 흘러가게 하는 방식이었고, 원도심에 개발 여력이 없어지면 신도시를 만들어 토건산업을 유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원도심은 신도심에 밀려 돈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침체의 늪에 빠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중심 시설들을 유치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의 경제 생태계를 현 상황에 맞게 재편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기회가 왔다. 제주시 원도심은 걸어 다니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고, 이미 아라리오라는 기업이 민간차원의 도시재생과 더불어 라이프스타일 샵을 유치하면서 지역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더불어 개인들이 운영하는 카페, 레스토랑, 바, 베이커리 등의 F&B, 작은 책방, 크래프트샵, 갤러리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샵들이 등장하면서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지역의 이야기, 지역의 재료가 로컬 콘텐츠이고, 로컬 콘텐츠를 활용해 사업을 영위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이 로컬 크리에이터들이고,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로컬 콘텐츠 타운이다. 제주시 원도심의 미래는 이들 로컬 크리에이터들에게 달려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제주성안을 로컬 콘텐츠 타운으로 지정하고,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에 힘을 써야 한다.
로컬 콘텐츠 타운은 도시 공간의 재구조화가 아니다. 새로운 건물을 만들고, 새로운 문화재를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는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장 시절 제주성 서문을 복원하자는 도시재생 활성화계획을 시도하면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도시의 재구조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다. 로컬 콘텐츠 타운은 도시를 운영하는 방식을 현시대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소프트웨어적 접근이다. 그 결과로 지역주민이 서문 복원과 같은 시도가 지역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주민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도시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기회가 오더라도 행정을 책임지고 정책을 입안하는 이들이 기회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정가, 정치인들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유다. 자신의 정치, 행정 철학만을 이해해 주는 전문가들만이 아닌 지역의 미래,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전문가들과 만나야 한다.
아쉬움에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제주개발공사가 원도심으로 본사 이전을 추진하다가 최근에는 제주시 도심의 가장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도련동에 자리하기로 한 신문기사를 접했다. 화북삼양이라는 신도심 인근이면서 필요한 사무 면적을 매입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토지가격이어서 의사 결정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도시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아쉬움이 있다. 영국 런던의 킹스크로스라는 올드타운에 굳이 구글이 들어온 이유는 올드타운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있고, 도시 인프라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글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 올드타운에서 소비하고, 창조하는 행위는 도시를 특별하게 만든다. 만약 제주개발공사가 제주시원도심에 입주한다면 어떨까. 그 영향력은 엄청날 것이다. 매일 유동인구 수천 명이 거리를 다니게 될 것이다. 물론 도심에 토지를 매입하는 것은 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다르게 해서 꼭 단일 규모의 큰 건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작은 건물 여러 개를 이용하여 수평적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스마트오피스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분산 입주된 여러 건물을 IT기술과 프로그램으로 연결하여 스마트도시를 만든다면 공기업으로서의 역할 이상을 하게 된다.
도시재생에서는 점으로 존재하는 콘텐츠를 이야기나 프로그램으로 이어 길로 연결되는 선을 만들고, 길 주변을 콘텐츠로 확장하여 면을 만드는 점선면으로 확장되는 개발 방식이 종종 회자되고 있다. 제주시 도심지에 슈퍼블록을 택해서 저밀도의 근생 건물 여러 곳을 매입 또는 임대하여 각 부서를 입주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큰 건물의 경우 협의를 위해 복도를 걷는 거리를 생각하면 건물과 건물 사이의 동선도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적 스케일의 원도심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비슷한 아이디어를 2013년에 서귀포시에 제안한 적이 있다. 서귀포의 미래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는 당시 고창후 서귀포시장의 요청이었는데 서귀포 도심을 활력 있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칼리지 타운'을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당시의 제안도 서귀포 도심의 근생 열 곳 정도를 임대해서 대안적인 예술대학을 운영하자는 것이었는데 당시에 서귀포시 또는 제주도에 훌륭한 예술인들이 많이 거주 또는 이주한 상황이어서 특히 영어로 강의가 가능한 예술인들을 강사로 초빙하고 짧게 머무르는 강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해 1년 4학기제로 운영하는 것이다. 지금도 서귀포 도심의 임대료는 그리 높지 않은 상황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임대료와 강사비, 운영비 포함 1년에 10억 원에서 15억 원이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어서 행정 내부적으로 검토를 했지만 정규 대학으로 검토가 이루어지면서 교육법인에 필요한 일정 규모의 자산 매입이 필수조건이라는 등 교육부의 인허가의 어려움 등이 제기되었고, 대안으로 하자센터도 검토가 되었지만 모두 불가 의견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정규대학으로의 접근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대학 형식으로 서귀포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의견이었지만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문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고, 누군가 서귀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면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과거의 일을 공유한다.
도시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한 명의 아이디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이디어를 내고, 진전시키고, 그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면서 공감대를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오히려 도시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해외의 대규모 개발사업에 거의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여 수천 번 만나 회의를 하면서 해당 사업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검토하면서도 디자인까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각광받는 이유다. 홍콩의 HSBC가 그랬고, 일본 도쿄의 롯폰기힐스가 그랬다. 행정기관이나 공기업이 십 년이 넘는 개발 과정을 끌고 가기에는 행정 프로세스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공공사업이기에 그 효과가 지역 사회에 좋은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