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상모 버스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뒤의 이야기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16시간 만에 멜버른 공항에 도착하였다. 호주 현지 시각으로 오전 10시, 한국 시각으로는 오전 9시였다. 처음 방문하는 도시의 공항이었다면 제법 허우적거리다가 시간을 지체하였을 텐데, 그래도 전에 한번 방문해 본 적 있는 장소라고, 공항 건물과 내부 구조가 눈에 익다. 지루한 입국 수속으로 심신이 지쳐서인지, 멜버른 도심으로 향하는 SKY 버스를 타고 공항건물을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호주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음이 실감이 났다.
40여분을 달렸을까?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버스 안내 방송과 함께 버스 안의 승객들이 각자의 캐리어를 들고 우르르 내린다. 공항버스 건물의 입구를 박차고 나오니, 스펜서 스트릿의 익숙한 건물들이 내 눈에 들어온다. 음.... 신기하다.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2013년 9월의 어느 봄날도, 오늘과 모든 것이 비슷했었다. 맑게 개인 파란 하늘이며, 조금은 선선한 바람결, 트램 특유의 덜컹덜컹 거리는 운행 소리. 뚜뚜뚜뚜 거리는 신호등의 낯선 안내음, 그리고 외국인들의 대화소리들까지 참으로 많은 것들이 그날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미리 예약한 호텔에 케리어만 맡기고는, 얼른 야라강 쪽으로 향해 본다. 전에 살던 셰어하우스 아파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건물도, 거리도, 도로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얼른 코너를 돌아 아파트 건물 앞 상가를 둘러본다. 역시나 이번에도 내가 찾던 가게가 그대로 있다. 10년 전, 나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해 주곤 하였던 바로 그 케밥집! 케밥집 가게 사장님은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셨지만, 가게의 케밥만큼은 그때의 그 맛 그대로이다. 나는 케밥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어슬렁어슬렁 야라강으로 다시 향하였다.
야라강 하면 떠오르는 내 머릿속의 이미지들. <크라운 카지노>, <사우스 뱅크>, <유레카 타워>, <갈매기 무리>, <잔디밭에서의 일광욕>, <블랙 스완>, <퀸 브릿지>..... 내 머릿속에 가득한 그 익숙한 이미지들이 10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변함없이 자리해 있다. 10년 전 멜버른을 처음 찾았던 그날도 이곳 야라강을 제일 먼저 찾았더랬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일광욕을 즐기는 멜버른 시민들! 특히나 흐린 날이 많은 멜버른의 겨울 시즌에는 이처럼 오후의 일광욕의 시간들이 삶의 질을 더욱 높여 준다고 한다.
오늘은 호주에 온 첫날이기도 하여, 저녁 시간 전까지는 멜버른 시내를 유유히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이곳에서의 지난 추억들을 떠올려 보려고 한다. 플린더스 스트릿 역과 페더레이션 광장, 써던 크로스 역과 플래그 스태프 가든, 퀸 빅토리아 마켓. 그 시절의 도시도, 거리도, 건물도, 트램도 모두 다 10년 전 그 시절 그대로다. 나와 함께 했던 도시는 10년이 지났어도 변함이 없는데, 오로지 나와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만 모두 이 도시를 떠나고 없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이 도시를 딛는 그 걸음걸음마다 예전의 그 즐거웠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울적해졌다. 이 도시에 오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그리고 실제로 도착하고 나서도 나는 무지 기쁘고 즐거웠었는데, 이곳에서의 일분, 일초가 흐르면 흐를수록 슬픈 감정들이 점점 나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도시는 분명 10년 전의 그 도시와 닮아있다. 하지만 10년 전의 그 도시와 지금의 도시가 완벽하게 똑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도시와 닮아 있었을 뿐이다. 이 도시를 채우고 있는 사람이 달라졌으니, 분명 이 도시도 알게 모르게 달라졌으리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나의 외모도 많이 변하였고, 심지어 나의 몸무게는 앞자리가 무려 3번이나 바뀌었다. 대학 졸업생에 취업준비생 신분이던 나에게도 반듯한 직장이 생겼고, 금산과 대전, 서울 밖에 모르던 나는 수원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세월은 정말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리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 역시 많이도 흔들리고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예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준 멜버른이라는 도시가 나는 매우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쓸쓸하게도 느껴졌다. 도시는 변한 게 없는데 나 혼자만 이 세월을 직격탄으로 맞은 것 같아서…….
나의 마음이 더욱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기 전에, 얼른 버스킹을 하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만에 찾은 이곳 멜버른에서, 왠지 나의 존재와 나의 공연을 기억하고 있는 소중한 인연을 만날 것만 같은 기분이 마음속 저 바닥에서부터 느껴졌다.
이 도시에, 아니, 이 세상에,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이 도시에서 보냈던, 행복하고 즐거운 지난날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일 것이다. 그 추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젊고, 밝고, 흥이 많은, 참으로 유쾌한 버스커로 존재할 것이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이곳 멜버른에서 상모 버스커로서 생활하며 느껴왔던 행복한시간들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