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멜버른의 상모 버스커>, 그로부터 10년 후의 이야기
공연을 마치자 배고픔이 밀려왔다. 저녁을 먹고 공연을 하면 속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저녁을 거른 채로 몇 시간째 춤을 추었으니 이제는 배가 많이 고플 만도 하였다. 저녁으로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공연한 장소 근처에 일본식 라멘집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라멘이 막 땡기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자주 먹던 음식을 이곳 호주까지 와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에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먹은 중국식 돼지고기 조림이 생각이 났다. 음, 아침에 먹은 중국식 돼지고기 조림이라면, 하루에 두 번을 먹어도 질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10분을 열심히 걸어 중국식 음식점에 도착하였고, 가게 문을 열었다. 어쩌면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마치 어느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이나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저 사람들은 왜 나를 빤히들 쳐다보는 걸까? 내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은 걸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지금 복장이 그리 평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공연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간, 마음속에 두 가지 마음의 파도가 일렁였다. 하나는, 지금 배가 너무 고프니 얼른 식당에 앉아 뭐라도 시켜 먹자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마음은 대충 이런 느낌의 마음이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의상이야말로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한국 전통 복장인데, 내가 이 옷을 입고 중국 음식을 먹고 있으면, 다른 외국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나의 의상이 중국의 전통 의상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바다만 건너기만 하면 어느 누구라도 모두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나 역시 한국의 전통 의상을 중국의 전통 의상으로 오해할 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나에게 저녁 메뉴 선택의 폭은 더 좁아졌다. 일단, 호주까지 와서 한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고, 일식도 크게 땡기지 않았다. 중국음식점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9시가 넘은 시간이라, 호주의 시내에 장사를 하는 가게도 많지 않은데, 대체 저녁으로 무엇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였다. 한 아시안 커플이 횡단보도 앞에서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커플은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자신들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 것도 모르고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그 상황을 보고 있던 내가 그들에게 짧게 소리쳤다.
“Oh, it’s your hat?” (어, 혹시 그거 당신 모자 아니에요? “)
그 아시안 커플은 그제서야 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모자를 확인하고는, 나에게 감사하다는 표시로 목례를 하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다시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들의 ”감사합니다 “ 발음은 영락없는 한국인의 발음이었다. 내가 아시안 커플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한국인 커플이었던 것이다. 설령 그들이 한국인 커플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내가 한국인인지를 어떻게 알고 나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꺼내었을까? 분명 나는 배기바지에, 브이넥에, 페도라에, 스카프까지, 전형적인 한국인의 패션으로는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혼자서 5분여를 곰곰이 생각하며 걷고서야, 내가 아직 공연복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더거리를 입고 걷고 있는 이상, 어느 한국인이 보더라도 나는 한국인으로밖에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한국인인지 어떻게 알고 그들이 나에게 한국말을 건넸을까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던 것이다. 이리도 어리석은 친구 같으니라고!
아마도 나의 글이 이쯤에까지 다다랐으면, 어쩌면 어떤 분들은 나의 저녁 메뉴를 제법 궁금해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도대체 나는 한국 전통 복장을 입고는 밤 10시에 어느 식당에서 무슨 저녁을 먹은 거냐고 말이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건물인 플린더스 스트릿 역으로 가서, 조각 피자 2개와 콜라 한 병을 샀다. 그리고는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 야라강의 야경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는, 호주의 달빛 아래에서, 피자와 콜라를 먹고 있자니 그 느낌이 여간 어색하고 낯선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언제 이런 류의 비슷한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였고, 어쩌면 내가 지금 현실 세계가 아니라 꿈속 세계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가도 싶었다. 달빛 때문이었으리라. 이 모든 게 다 저 야라강 위에 뜬 달빛 때문이었으리라. 10년 만에 찾은 호주에서의 첫날밤이 그렇게 조금씩 깊어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