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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06. 2023

홍익인간전당 이야기 1

  1-1. 홍범도 전기 

        

 홍익인간 전당(弘益人間 殿堂)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던 홍범도 대장을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2,02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흉상이전으로 화제에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범도(洪範圖전기    

 

  나는 지금 병상에 누워 있다. 

  잠깐 의식이 들었는데, 문득 병실 TV에서 나오는 울산의 한 공장 노동자가 고공 노동투쟁 중 떨어져 다친 뉴스가 들린다.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고, 마치 꿈 속인 것처럼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나는 그런 나를 따라 다니면서 또 다른 일생을 산다.      



 1. 전생(前生)     


 내 이름은 홍범도, 1868년 음력 8월 27일에 평안남도에서 빈농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우리가 빈농으로 사는 이유를“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증조부 홍이팔(洪二八)이 가까운 친척으로 가담해서 처형되고, 따라서 남양 홍씨 일가가 모두 멸족되다시피 하였을 때, 할아버지 홍동철이 난리 통에 식솔을 이끌고 은신해서 숨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1) 어린 시절  

   

 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며 젖동냥을 얻어 먹이며 나를 기른다. 

 1877년, 나는 9살이 되던 해에 머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겹쳐 고아가 되고, 숙부의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살다 부잣집 머슴살이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1883년 15살이 되던 해 머슴살이를 청산하고자. 나이를 2살 높여 17살로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가 된다.  당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94년)으로 나라가 어지러웠고, 군대 역시 기강이 무너져 부대 내에서 차별과 폭행이 난무했다.

 결국 나의 군인 생활 역시 불행의 연속으로, 괴롭히던 상관을 살해하고 군 생활 4년 만에 탈영한다. 탈영 후 다시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 취직하지만, 임금 체불 문제로 말타툼 끝에 공장주를 살해하고 도주한다.   

  

 (2) 결혼     


 1890년, 22살이 되던 해는 불행 가운데 첫 행운이 찾아오는 해이다.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서 승려 지담(止潭)을 상좌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상좌승으로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수도생활을 한다. 

 평생 교육을 못 받던 나는 그제야 글과 한국사에 대해 배우고,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 스님에게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들으며 쓸모있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꿈을 키운다.       

 그러던 중 절 내에서 비구니 생활을 하는 이씨를 만나 사랑에 빠져,  남 모르게 부부로 산다. 일생에 처음 맞는 행복으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나를 보며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그러나 운명은 일생에 처음 만난 나의 행복을 송두리 채 빼앗아 간다. 이씨가 임신을 하여 어쩔 수 없이 함께 환속해 신계사를 나가지만, 오갈 데가 없어 아내의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향하는데,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아내와 생이별을 한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아내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에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농사일로는 살 수가 없어 밑천을 다 털어 총을 구매하고, 강원도 북부에서 사냥꾼(포수) 생활을 시작해 포수권익 단체인 포계(砲契)의 대장이 된다.      


(3) 항일의병활동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온 나라가 들끓었지만, 나는 포구로 살았기에 삶의 위협을 받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운명은 내 한몸 지키며 살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1895년, 내가 27살 되던 해에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으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나고, 일본제국이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을 발령한다. 나는 이에 반발하여 강원도 회양군에서 김수협 등 14명과 의병을 일으킨다. 

 이때 까지만 해도 나의 의병 활동은 먹고 살기 위해서인데,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후 함경도 안변의 학포로 도주해,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한다.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를 하나, 김수협 및 여러 의병이 죽고 도주하는 등 기세가 사그라들자 의병을 해체한다. 

 나는 의병 해체 후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 노동자로 숨어 산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이 끊이지 않아 피해서 함경도로 향하다,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때려눕히고 총 3정을 빼앗고, 함경도 덕원읍의 좌수 전성준을 공격해 금품을 빼앗는다.     


  1897년 죽은 줄 알았던 아내 소식을 듣고 함경도 북청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들 홍양순을 5년 만에 재회한다. 이 해에 차남 홍용환을 얻고, 가족들과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 및 화전농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또 다시 포수권익 단체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이 된다.

 1905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乙巳條約)에 대해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을사의병이 일어나지만, 나는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 포수권익 단체 활동에만 집중한다. 모처럼 다시 이룬 가족들과의 일상을 허물어뜨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자, 일본제국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에 따라 총기를 수거하려 하고, 나는 11월 차도선 등과 포수 70명과 함께 다시 산포대라는 의병을 일으킨다. 

 내 생애 처음 맞이한 가족들과의 일상이 무너지겠지만, 포수에게서 총을 뺏으면 생계를 이룰 수 없으니, 난세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산포대를 이끌고 일본헌병 및 일본 육군과 크고 작은 37회 전투를 벌인다. 함경도 북청의 후치령에선 적군 2명과 순사 1명을 사살하고,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군경 70명과 3시간 격전하여 30여명을 살상한다. 500~700명까지 의병이 늘어, 강원도~함경도의 삼수, 갑산, 혜산, 풍산 등에서 유격전으로 수비대를 격파한다.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전념하고, 산 속에서 먼 거리를 신속히 이동했기에 '나르는(Flying)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는다.

 내가 유명해지면서 일제의 감시로 가정은 다시 풍비박산이 나고, 1908년 4월 결국 아내가 고문으로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 나에게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아내가 "계집이나 사내, 영웅호걸이라도 실낱 같은 목숨 없어지면 그뿐이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며 끝까지 버텼다고 전한다. 


 이 일 이후 큰아들이 나를 찾아와 "이제 그만 일본군에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전한다. 아마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일본제국의 협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한다. 나의 호통에 큰아들 역시 설득되어 의병에 합류하고, 6월 16일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나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다. 아내와 큰 아들을 잃은 나는 작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활동 근거지를 중국으로 옯기기로 결심한다.     


 그해 10월, 나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동지 3명과 함께 작은아들을 데리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근거지를 옮기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아들도 의병 활동에 동참하여 고생하다 결핵으로 병사한다. 

 결국 나는 의병 활동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다시 혼자가 되어 울부짓는다.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 이것은 나의 운명으로 이런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리고 이젠 지킬 가족이 없으니,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4) 독립운동     


  1909년 6월 나는 41세에 홀로 고국으로 돌아와,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한다. 을미의병 시기 친해진 유인석이 이 소식을 듣고 '역량을 키우라'는 격려와 권고 편지를 보내온다.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고, 나는 그해 8월 길림성의 백두산 인근 장백현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쓴다.

  1911년 나는 연해주로 망명해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가는데, 당시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불리는 1905년 페테르부르크의 동궁광장(冬宮廣場)에서 일어난 노동자 학살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혁명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1917년, 러시아는 2월 혁명으로 불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게렌스키의 군주제·자본주의·반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임시정권이 수립되는데, 노동자·군사 대표인 소비에트 대중들과 국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임시정부가 성립된다. 

 두 세력 간의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소비에트 대중들은 전쟁을 속행하는 임시정부에 대하여‘빵과 평화’를 요구했는데, 블라디미르 레닌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볼셰비키) 세력이 이들을 주도하여 내전을 일으켜 10월 혁명이 일어난다. 볼셰비키 세력은 10월 말, 무장봉기로써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이 러시아 내전을 적백내전(赤白內戰)이라고도 하는데, 레닌의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의 적군(赤軍)과 군주제·자본주의·반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군(白軍)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적군을 노동적위군(勞動赤衛軍) 혹은 줄여서 적위군(赤衛軍)이라고도 하는데, 적군이 정식명칭이다. 

 레닌 사회주의는 공동 생산, 공동 분배가 되는 체제를 지향했기에 공산주의라고도 부른다. 러시아 혁명을 이룩한 레닌의 공산당 이름이 볼셰비키이고, 레닌주의 국제 공산당 연합이 코민테른이다.     

 

 시베리아에서도 적군과 백군의 대립은 이어지는데, 러시아 흑룡주정부가 독립하여 극동공화국이 되고, 이 공화국은 볼셰비키 세력의 조종을 받으며,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된다. 

 일본군은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연해주에 진주한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나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한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적군과 손을 잡게 되는데,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나도 적군과 손을 잡게 되고, 나와 소련 공산당의 첫 만남이다.     


①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의 탄생과 자유시 이동    

 

  적군과 손을 잡은 받은 한인들은 고려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로 나누어지는데, 공산주의 계열의 고려공산당은 또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두 개의 파로 나뉘어 경쟁한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1918년 이동휘·박애(朴愛)·전일(全一)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인사회당인데, 한인 공산주의 단체 중에서 유일하게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조직이 된다. 

  상하이파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나, 1921년 5월 상하이 임시정부와 노선차이로 떨어져 나가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는데, 정통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는 편의적 공산주의로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기에 상하이파라고 부른 것이다. 

 무장부대는 대한의용군(사할린부대, 사할린 의용대)으로 대한의용군은 일리아 박의 이항부대와 최니콜라이의 다반군대이다. 대한의용군은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했던 빨치산 부대이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1919년 김철훈(金哲勳)·오하묵 등이 중심이 되어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을 만드는데, 이들이 볼셰비키의 한인지부가 되면서 이르쿠츠크가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 된다.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하나, 1921년 5월 대한국민의회와의 노선차이로 떨어져 나가 상하이파와 똑같이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한다. 그래서 이르쿠츠크파로 부른다. 

 무장부대는 자유대대(고려혁명군)로 대표적인 부대는 오하묵의 부대이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다. 

 나의 대한독립군은 1919년 당시 임시정부 지원단체였던 대한국민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으로 자유대대(고려혁명군)에 속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단체와 공산주의 계열 항일단체 양쪽에 다 속한 셈이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간도국민회(1914년 창설)가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는데, 나의 대한독립군은 1919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의 일본 병영을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히 전개한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전투 사건이 일어난다. 니콜라옙스크 전투 사건은 니콜라옙스크에서 벌어진 전투와 학살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일리야 박이 지휘한 대한의용군(사할린부대)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시키지만, 적군과 대한의용군이 자행한 테러로 인해 니콜라옙스크에서 수천명이 사망하고 지역이 폐허가 되고, 적군에 의해 도시의 여성(소녀, 부인)에 대한 대규모 강간살인이 발생한 대규모 학살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나는 물론 모든 독립군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일본군은 니콜라옙스크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한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일본군을 피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도 어쩔 수 없이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한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해주의 공산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떠나는데, 사령관 김표돌·부사령관 박개서와 김덕보로 이루어진 이만군대와 사령관 최니콜라이가 이끄는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이다.   

   

 ②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의 조직 확대     


  1920년 3월 나는 좀더 대규모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기 위해 북만주 지역 독립군의 통합과 연합을 추진하는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던 대한국민회 산하의 대한국민회군과 연합하여 간도국민회 직할의 정일제일군(征日第一軍)을 결성한다. 

 정일제일군은 대한독립군은 내가, 대한국민회군은 안무가 각각 지휘하되, 군사 작전을 벌일 때에는 내가 사령관으로 모두를 이끌도록 하고, 재정과 행정은 대한국민회가 관장한다. 

  그 후 전술하고 있듯이 1920년 4월 자유대대가 대한의용군과 함께 자유시로 떠나면서, 나는 정일제일군에만 속하게 된다.      


 1920년 5월 만주 지역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의 통합과 연합의 확대로 정일제일군은 조직이 확대된다. 

  5월 3일 최진동의 근거지인 봉오동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광복단(光復團), 의군부(義軍府) 등 6개 독립운동 단체 간부들의 연석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단체들은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하며, 여러 차례 공동 작전을 펼쳤던 나의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의 연합이 우선 추진된다.  

 마침내 1920년 5월 28일 봉오동에서 독립군 단체들이 나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한북로군(大韓北路軍)을 결성한다.      

 대한북로군 역시 각각의 부대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되,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이 부장(府長)을 맡아 안무를 부관(副官)으로 대한북로군의 행정과 정치, 재정 등을 주로 담당하기로 하고, 군사 작전을 벌일 때에는 내가 북로제1군부장(部長)으로 사령관이 되어 주건(朱建)을 부관(副官)으로 대한북로군의 군사를 담당하기로 한다. 

 대한북로군이 치루었던 전투 중에 가장 유명한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이다.   

   

③  봉오동 전투 (1920년 6)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일제 군경 부대인 남양수비대(남양수비대 10명, 헌병 경찰 7명 합계 17명)가 항일군 추격대를 조직해 오전 11시경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인 화룡현 삼둔자를 침공한 것이 계기가 된다. 삼둔지 전투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일본군 육군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이기도 한데, 넓게는 봉오동 전투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 새벽에 동간도 화룡현 삼둔자에서 출발한 대한북로군 소속의 나의 대한독립군 부대와 최진동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의 1개소대와 신민단 독립군 예하 1개 소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초소를 선제 습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후 6월 6일 일본의 월강추격대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불법으로 중국 영토인 삼둔자에 왔으나, 독립군이 보이지 않아 보복으로 양민을 살육하였다. 삼둔자 범진령 고개에 숨어있던 독립군 부대는 매복한 지점 한가운데까지 이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궤멸, 퇴각시킨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이 병력을 출병하여 추격대를 꾸리고,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선다. 대한북로군의 대한북로독군부는 일제의 항일군 추격대가 봉오동으로 오는 걸 알게 되고,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한다.

 당시 봉오동은 분지(산지로 둘러싸였고 지역 안은 평평한 지역) 형태이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 정도 형성되어 있으며 골짜기 안에는 마을 세 개가 있다. 지형을 고려해서 나의 대한독립군 부대 800~900여명이 4개 중대로 편성하고, 각 중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갈라 놓아 배치한다.     

 당시 대한북로군 부대들은 신식 총기로 무장하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이 딸린다. 거기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 부대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북로군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기관총을 쓰기 어려운 장소이다. 또 매복할 경우 피아 구별이 힘들어서 일제군이 포병을 쓰기 힘들다. 


 나는 의병 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을 봉오동에도 그대로 적용하기로 계획하고, 일제군을 기다린다.     

 먼저 와서 대기하던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야스카와 추격대가 오자 그쪽으로 합류해 토벌대를 만든다. 토벌대는 8시 30분경부터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는데, 자기네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바로 사살을 명한다.

 그러나 조선인 민간인들은 이미 집을 빠져나와 피란을 가고, 많은 집들은 사람이 없어 비어 있다. 석현 주재 중국인 순경들이 순찰하다가 일제 토벌대를 발견한다. 중국인 경찰들이 일제 토벌대에게 자신들 땅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지만, 일제 토벌대는 중국 경찰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더욱 침입한다.


 일제 토벌대는 늦은 아침을 지어 먹고는 한 농민에게 가서 수레에 기관총을 실으라 요구한다. 수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마을 주민들을 발견한다. 토벌대는 그 마을을 향해 "암탐사격"을 하며 무차별로 쏴 갈긴다. 피란 가지 못한 한인 민간인들은 기관총에 살해된다.      

 나는 처참한 동포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오후 1시경 토벌대 척후병이 매복 지점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그 척후병을 그대로 보내 주고 토벌대 본대를 기다린다. 토벌대 본대는 그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암탐사격(위력수색)을 한다. 여러 곳에 무차별 사격했지만, 우리 부대는 대응하지 않는다. 우리 부대는 짧은 기간에 모집해서 편성한 부대이지만 훈련을 제대로 받은 부대이다. 따라서 병사들은 나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르고, 매복 성공 여부는 따질 필요가 었다.      

 토벌대는 행군 종대 대형인데, 우리 부대가 매복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토벌대 본대가 드디어 매복 장소로 다가온다. 내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아 발포명령을 내리고,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우리 항일부대가 사격을 퍼붓는다. 일본군들은 화력이 우세하지만, 지형 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퇴각한다. 

 우리 항일부대는 그런 도주하는 일본군들을 계속 추격하며 사격한다. 그러다 오후 4시 20분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더니 폭우가 쏟아진다. 우리 항일군 지휘부에서는 파란 손 깃발을 흔들고, 우리 항일부대 군인들은 물러난다. 일본군들은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 건너편까지 철수하고,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철수한다. 결국 우리 부대는 일제 추격대를 격퇴한다.   

  

② 청산리 전투(1920년 10)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는 내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등이 주축이 된 대한북로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싸움이다.   

   

 일본은 봉오동전투 등 많은 항일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대대적인 간도 지역 한국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창장하오[長江好]라는 중국 마적 두목과 내통해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공격할 것을 사주하하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일으킨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 2일 400여 명의 마적단이 훈춘성을 공격해 온다. 마적단은 약속대로 오전 9시부터 4시간 동안 살인과 약탈을 자행,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수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비어 있던 일본공사관을 불태운다. 일본은 이 조작된 사건을 구실로 3개 사단을 출동시켜 심문없이 무조건 잡아 일렬로 세운 후 총살하고 불태우는 등 대학살을 저지른다. 또한 싱징(興京)에서는 메이지천황절(明治天皇節) 축하를 명분으로 조선인들을 모으고는 우선 황신내교회 간부 9명을 체포, 살해한 것을 시발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살해 매장한다. 


 일제는 이어서 훈춘사건을 구실로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투입하여 한인사회와 독립군을 탄압한다. 중국 관헌들은 일본군의 강요로 독립군을 탄압할 수 밖에 없고, 결국 독립군단에게 근거지를 이동할 것을 요구한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고자 본영을 떠나 허룽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의 서북방 삼림지대로 진군한다. 이곳은 험준한 삼림지대로 일제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국경과 근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중 동지대(東支隊)는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에 돌입한다. 이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대한북로군 연합부대는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린다. 

 일본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21일 아침 백운평으로 들어온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하고,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한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山田)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독립군을 협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퇴각한다. 

 대한북로군 연합부대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지만,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한다.     


 일본군은 같은 시각에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내가 이끄는 대한북로군 연합부대를 공격한다. 

 나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치고,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한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한다.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 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平)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한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어랑촌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 알린다. 공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 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한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나와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북로군 연합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어 승리를 거둔다.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며, 10월 25일에는 나의 대한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한다.

 우리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격하나, 이미 독립군은 공격을 대비해 매복하다 즉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 문득 나는 내가 보고있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내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알기에 두 전투는 2019년 봉오동 전투(영화)로 대중들 사이에서 독립군의 대표적인 전과로 대첩(大捷)이라는 말도 붙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대첩이라기엔 전투 규모나 전과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보고 있는 전투 규모나 전과로 보아 역사적으로 명확한 대첩이라고 보기 좀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독립군의 게릴라 수준의 열악한 장비와 병력, 보급, 훈련도 등 여러모로 열세한 상황에서 일본제국군 정규군과 한바탕 싸운 그 정신과 의의가 중요하는 생각도 한다. 그런 면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봉오동-청산리 전역과 여러 전투를 전과 부분에 매몰되지 말고 그 자체의 의의를 보는 태도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③ 간도참변과 대한독립군단 결성     


 1920년,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패하자, 이에 보복으로 3개월에 걸쳐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해 간도참변을 일으킨다.

  조선인의 재산과 식량을 약탈한 후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는데,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依蘭溝)에서는 전 주민 30여 호가 살해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고,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학살한 조선인 수는 3만여 명에 이르며, 노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한다.     


 간도참변(間島慘變)으로 서간도, 북간도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한북로군 연합부대산하의 간도 한인무장부대들은 큰 피해를 입는다.

 같은 해인 1920년, 결국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밀산시(密山市)에 11개의 독립군 부대가 모이고, 모인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북로군 연합부대를 대신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다.      


  대한독립군단의 10개 부대조직은 다음과 같다.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은 대한독립군단 결성을 위해 12월 밀산(密山)에 대한신민회의 대표로 김성배(金聖培)를 파견했으나 성과가 없다.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대한독립군단의 주도 조직. 대종교 계열.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1919년 만주 북간도에서 조직. 

 ▷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洪範圖), 부사령관 주건(朱建), 참모장 박경철(朴景哲). 1911년 연해주에서 조직.

 ▷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 : 기독교 감리교 계열. 단장 김규면(金圭冕).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 

 ▷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 개신교 계열. 구춘선(具春先). 1919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조직. 

 ▷ 혼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 회장 이명순(李明淳). 1919년 만주 혼춘에서 조직. 

 ▷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의동(鳳義洞)에서 조직. 사령관 최진동(崔振東).

 ▷ 의군부(義軍府) : 총재 이범윤(李範允). 1919년 만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조직.

 ▷ 혈성단(血誠團) : 단장 김국초(金國礎). 191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

 ▷ 야단(野團) : 동학의 한 교파인 청림교(靑林敎) 계열. 단장은 신포(申砲)로 일명 아소래(我笑來)로 불림. 1919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조직. 

 ▷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 총재 이규(李圭). 1919년 만주 안도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에서 조직.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徐一)이고, 나는 부총재를 맡으며, 고문은 백순(白純)과 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과 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이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제1여단에는 여단장 김규식(金奎植)과 참모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에는 여단장 안무(安武)와 참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에는 기병대장 강필립과 중대장 김창환(金昌煥), 오광선(吳光鮮), 조동식(趙東植) 등이 선임된다. 

 여단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고, 총병력은 3,500여 명으로 대규모 병력이다. 그러자 역설적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과 피복, 군량 등 여러 지원이 더욱 절실해진다.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해 항일조직을 강화하지만, 일본군의 토벌전은 더육 강화되고, 이에 협력하는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나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소련 영내로 탈출한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며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코민테른의 방침은 매력적인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의 오하묵이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군대주둔지를 마련할테니 이곳으로 집결하기를 권한다. 이에 지원이 필요하던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무장부대들은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한다.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에 집결하는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고,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이 자유시 합류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  "홍범도 전기(2)"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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