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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자 May 06. 2022

결단력 있는 길치의 여행법(2)

낯선 도시를 사랑하게 하는 이유

나는 결단력 있는 길치다.
여행에서는 잘못된 길도 당당하게 걷다 보면 맞는 길이 된다.

여행에서 찾아가는 목적지도 중요하다. 목적지를 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공부도 한다. 만나기 전에는 설렘에 잠 못 이루고, 비소로 직접 만나는 순간 온몸의 전율을 느낀다.
서울의 창경궁이나 경주의 안압지는 경험한 적 없는 과거가 주는 아련함을 줬다.
파리의 에펠탑이나 런던의 타워브리지, 스위스 시골 마을의 풍경은 꿈을 이룬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여행의 목적지가 주는 감동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열심히 물을 줘서 얻어낸 수확물이라면,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에 길을 잠시 잃고 만나는 인연은 땅에서 주워 든 보석이다.
계획한 적도, 기대한 적도 없는데 행운처럼 찾아오는 선물을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여행지에서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낯선 곳에서는 길을 좀 잃어도 괜찮다.


결단력 있는 길치의 여행법(1) - 낯선 사람들


홍콩 여행의 첫날,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함께 간 친구가 꼭 사야 하는 쿠키가 있다고 했다.

여행을 할 때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친구지만 어째서인지 자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 친구다.

특별한 목적 없이 발 길 닿는 데로 여행하는 나와는 달리 '꼭 가봐야 할 곳, 꼭 먹어야 할 것' 등의 리스트를 성실하게 정해 오는 친구다. 다만 그 친구의 목적을 실현시켜주는 일은 항상 내 몫이다. 나의 '길치력'이 그냥 커피라면 그 친구는 T.O.P라고 해야 한다.


친구가 보여준 가게의 상표와 지도상의 위치를 대충 보고 길을 찾아 나섰다.

"분명 이쯤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알고 가는 것 맞아?"

"가다 보면 나오겠지. 유명한 곳이라며? 어떻게든 티가 나겠지"


한국식 먹자골목 정도로 생각하고 가다 보면 간판이든 뭐든 눈에 보일 거라 여기며 무작정 걸었다. 하지만 찾는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낡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들은 죄다 똑같아 보였고, 건물 옆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판은 본래의 목적을 잃은 듯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때 '길 잃기'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이럴 땐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Excuse me."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붙잡았다.

제니 베이커리가 어딨냐고 당당히 물었다.

유명한 곳이라기에 현지인은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나는 그런 것 몰라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심히 당황했지만 어쩌겠는가. 고맙단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려는 찰나 이번엔 여자가 우리를 붙잡았다. 찾는 곳이 제니베이커리가 맞냐고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본인 아이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한 지도와 함께 우리에게 길 안내를 시작해주었다. 

시간으로 보나, 여자의 옷차림으로 보나 출근길이 분명했다. 간단히 길만 물어보려던 게 바쁜 출근길 사람을 붙잡고 민폐를 끼치는 꼴이 된 것 같아 쫓아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관광객이기에 그녀의 상황을 모른 척했다. 제법 먼길을 걸어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녀는 웃으며 좋은 여행을 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쿨하게 떠났다. 

뭐라고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에 얼른 여자를 다시 쫓아가 주머니에 있던 롯데 자일리톨 껌 한 통을 건넸다. 영어가 짧은 탓에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어 냅다 건넨 게 껌이라니. 내가 저지른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것도 나였다. 다행히 마음씨 좋던 그 여자는 다시 웃어 보이며 제 갈 길을 갔다.


솔직히 처음 홍콩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무서웠다.

낯선 광둥어는 뭔가 좀 공격적으로 들렸다. 공항에서부터 마주친 공안이며, 매장 밖에서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는 상인들은 괜히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중국과 중국인, 그와 관련된 문화권을 향해 갖고 있던 선입견도 한 몫했다.

하지만 길을 묻기 위해 우연히 만난 한 사람으로 그 모든 거리감이 한껏 가까워졌다.

덕분에 여행기간 내도록 좋은 마음으로 홍콩을 보게 되었고, 결국엔 홍콩을 다시 방문하게 만들었다.


몇 년 후, 다시 찾은 홍콩에서도 나는 역시 길을 잃었다.

첫 번째 홍콩 여행의 기억이 너무 좋아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방문했던 여행이었다.

몇 년 사이 기술은 발전했고, 종이지도 대신 스마트폰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손에 쥐었다.

구글 지도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 떨어져도 길을 잘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하지만 여행 첫째 날, 첫 일정부터 나는 또 길을 잃고 말았다.

분명 지도를 따라 걷고 있었지만 계속 같을 길을 뱅글뱅글 도는 기분.

서서히 다리는 아파오고, 멘탈이 나가고 있던 찰나 길 건너편에 있던 택시기사가 나를 불렀다.


"Hey! I saw you!"


이것이 영화라면 충격적인 장면이 이어질 것만 같은 대사, 삐딱한 자세로 택시에 기대에 손가락 두 개를 까닥거리는 제스처, 당장이라도 나를 어떻게 해 버리겠다는 말투, 그리고 그 장면과 딱 어울리는 남자의 외모는 공포감을 조성했다.

이대로 뛰어서 도망을 쳐야 할까? 도망친다고 달아날 수 있을까? 잡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찰나의 순간에 온갖 상상력이 더해져 혼자 혼돈 속에 서 있었다.

그 사이 기사는 천천히 나 쪽으로 다가왔고, 아까보다 더 험악한 표현으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몇 번이나 당신을 봤다. 어디로 가려고 그러냐?"

여전히 이 사람이 친절을 베풀려는 사람인지, 나를 헤치려는 사람이지 판단이 되지 않아 우물쭈물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수첩을 낚아채 보더니 내 숙소 위치를 알아냈다. 


"아, 이곳이 어딘지 내가 안다. 반대쪽으로 30분은 걸어서 가야 한다. 원하면 내 택시를 타고 가도 되고, 원치 않으면 왼쪽으로 돌아서 좀 걷다가 다음 골목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말에 집중하니, 여전히 험상궂은 표정과 공격적인 말투로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다소 표현은 거칠었지만, 낯선 곳에서 길 잃고 헤매는 어린양을 발견한 택시기사는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 순간 베이커리 위치를 알려주던 여자가 함께 떠올랐다. 적어도 나에게 홍콩은 친절한 도시고, 몇 번이고 다시 방문하고 싶은 여행지로 자리 잡던 순간이다.


길을 잃은 채 만나는 친절한 사람들은 그저 한번 방문하고 말지도 모르는 여행자에게 그 나라 전체가 되는 듯했다. 그리고 나에게 매번 친절한 사람을 만나는 행운이 따라주는 것에 감사하다.

여전히 나는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길 잃고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그 나라를 기억하는 지표가 된다.

길을 묻기 위해 나눈 짧은 대화는 차곡차곡 쌓여 내 여행기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채워진 이야기들은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


요즘에 나는 길을 묻고 헤어지는 길에 꼭 그들의 이름을 물어본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름도, 얼굴도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그 순간 이름을 주고받음으로써 짧은 순간이라도 친구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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