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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자 Oct 15. 2020

결단력 있는 길치의 여행법(1)

낯선 사람들

나는 결단력 있는 길치다.
항상 길을 잃으면서도 언제나 남들보다 앞서 걷는다.
게다가 공간지각 능력은 제로에 가깝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 일이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당도해야 할 목적지가 있고,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길을 잃으면 사건 또는 사고로 기록된다. 다행히 내 여행에는 목적지가 없다. 그래서 사건과 사고 대신 만남이 있다.

길치력이 빛을 발하는 공간은 노래방 그리고 여행지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노래방의 구조는 나 같은 사람이 잠깐 나갔다 돌아가는 짧은 순간에도 길을, 아니 방을 잃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잘못 찾아 들어간 곳에서  낯선 이들과 손에 손 잡고 흥겨움을 나눌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종종 길을 잃어 잘못 찾아간 곳에서 행운의 인연이 나타난다.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은 소금이 되어 간을 맞춰준다. 삶이 끝나는 날 '그래도 맛있는 인생이었다' 돌아볼 수 있도록.

그렇기에, 낯선 곳에서는 길을 좀 잃어도 괜찮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낯선 곳,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헤매는 것을 좋아한다.

나에게 여행은 목적지 없이 세상을 구경하는 걸음이다.

걸어가는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과 나누는 영혼의 대화를 참 좋아한다.

대화라고 해봐야 겨우 가벼운 인사 몇 마디 나누는 게 전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대화라 부른다.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온 신경을 상대에게 집중한다. 작은 행동 하나, 흔들리는 눈빛까지 읽어내기 위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깊숙이 들여봐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정말 상대가 해 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내 안에 숨어 있던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종종 낯선 사람의 눈빛을 통해서 듣는 이야기는 삶의 지표가 된다.


노래방 못지않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복잡한 건물, 그 사이에 생겨난 작은 골목길, 좁은 길 위에서 뒤섞여 부딪히는 사람들. 현지인도 여행객도 저마다의 이유로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이름 모를 내 인생의 안내자들이 살고 있는 홍콩에서 나는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처음 홍콩을 방문했을 때 나는 공항에서부터 '길 잃기'를 시작했다.

공항 구석구석 글로, 그림으로 길을 안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항이란 공간은 길 잃기도 좋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처음 마주하는 곳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때론 공항이 전쟁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첵랍콕 국제공항은 새벽이었다. 공항은 한산한 편이었고,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길 잃을 일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고, 항상 그렇듯 나는 정신이 없었다.

미리 알아본 바에 따르면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는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열차가 운행하지 않았다. 택시를 탈 생각으로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헤매고 있었다.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은 내게는 그저 장식일 뿐이었다. 같은 자리만 수차례 돌아다녔다.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제복을 입은 남자가 화려한 광둥어로 불러 세웠다. 그는 공항에서 근무하는 공안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공안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높낮이가 분명한 홍콩의 말은 시비 거는 것 같이 들려 더욱 겁이 났다. 무언가 열변을 토하던 그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지 끝내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의 손이 나를 향해 내려칠 것이라 예상한 나는 움찔거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손끝은 멀지 않은 곳에서 출발을 준비하는 열차를 가리켰다. 내가 미처 상황을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공안은 내 캐리어를 끌고 열차를 향했다. 짧은 다리로 부랴부랴 쫒아간 나는 요금도 안 내고 열차에 탑승했다.

어디로 가는 열차인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열차의 문은 닫혔고, 문 밖에서 공안은 밝게 웃으면 나를 배웅했다. 분명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절함을 음미하기엔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끊어져 가는 정신줄을 잡으며 답해 줄 사람도 없는 질문, 아니 노래를 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새벽 시간이라 열차 내에 빈자리가 많았지만 입구에 그대로 서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일단 숙소는 침사추이에 있고.."

열차 내의 전광판은 친절하게 다음 역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딱 하나,

아름답게 흘러가는 저 문자는 한자라는 고귀한 언어다!

절대 읽을 수 없는 전광판의 한자를 어떻게를 해석해 보겠다며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환청처럼 어설픈 한국말이 들려왔다.

"침사추이로 가십니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또다시 낯선 남자가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서 있었다. 공항에서 만난 공안과는 다르게 왜소해 보이긴 했지만 경계심이 생기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말이 통하는 상대를 처음 만났기에 두려운 마음은 숨기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네, 숙소가 침사추이에... 이 열차는 어디로..?"

누가 봐도 겁먹은 사람처럼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친절해 보이려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거 가요, 침사추이. 두 정거장에 내리시면 됩니다."

열차 노선도의 두 번째 역을 말하는 건지 두 개의 역이 지난 후를 말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숙소가 있는 침사추이로 가는 열차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안도감이 들면서 동시에 억지스러워 보이던 남자의 미소가 친절한 미소로 보이기 시작했다.

 "땡큐 땡큐, 씨에씨에"

할 수 있는 표현을 모두 동원하여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자주 잊고 마는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를 다시 한번 새겨 넣었다.

첫 번째로 멈춰 선 역에서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는 다시 한번 "두 정거장에 내리시면 됩니다"라고 알려주고 내렸다. 그 미소가 왜 처음엔 무서워 보였을까. 경계를 조금은 풀어도 되겠다 싶었다.

 

다음날 아침,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지만 여행 첫날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일찍 숙소를 나섰다.

일찍 일어난 새가 길을 잃어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숙소 근처에 있는 큰길 끝에서 '홍콩홍콩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로 무작정 들어섰다.

때마침 눈에 들어온 계단을 따라 올랐고, 숨이 차기 시작하는 순간 현지인들이 줄 서 있는 식당이 보였다.

여전히 알아볼 수 없는 한자로 된 메뉴판을 보는 척하다 아무거나 주문했다.

"넘버 투, 원 프리즈"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홍콩식 프렌치토스트와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홍콩 도착 이후 모든 일이 막힘 없이 풀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쯤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여행엔 사건과 사고는 없다. 그저 만남이 있을 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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