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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자 May 07. 2020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

시장으로 간다 - Mercat de la Boqueria

여행지에 도착하면 시장으로 간다.
시장을 눈으로 한번 쓰-윽 훑어보고 간단한 간식거리를 구입한다.
입안 가득 달달한 음식을 물고 시장 속 사람들을 구경한다.
'아, 이곳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아, 이곳 사람들도 내가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구나.'
서로 다른 두 개의 감상을 동시에 느끼며 여행을 시작한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나는 그만 에펠탑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꼭 파리를 가리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르는 동안 시간 때문에, 돈 때문에, 심지어 자연재해 때문에 수 차례 유럽여행이 미뤄졌다.

결국 만만한 일본이나 홍콩,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제주도를 방문하는 것으로는 대신했지만 에펠탑에 대한 나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29살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비행기표부터 덜컥 질렀다.

10대부터 꿈꿔왔던 에펠탑과 만남을 30대가 될 때까지 미룰 수는 없다는 핑계로 드디어 행동한 것이다.

마침 20대를 온전히 바쳐왔던 전공과도 작별하던 때였다. 다시 시작할 다음 인생을 위해서도 꽤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교 동기와 함께 한 달 동안의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했다. 그 여행에서의 내 목적은 명확했다.

에펠탑을 앞에서, 뒤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가까이에서, 멀리서 보겠다는 거였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의 눈부신 햇살과 한 번, 맛있는 저녁 먹고 숙소 돌아가는 길에 또 한 번, 파리에서 보내는 모든 순간 에펠탑만을 보고 또 보겠다는 거였다.


함께 가기로 한 친구는 에펠탑도, 로마도, 이탈리아 남부의 투명한 지중해 바다도 좋아하지만 스페인을 사랑한다고 했다. 파리는 우리 공통의 목표였고, 나머지 일정은 친구에게 맞춰주었다. 나는 여유가 된다면 뮌헨도 가고 싶다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친구가 사랑한 스페인과 뮌헨을 모두 구경하기엔 우리 일정이 짧았다. (둘 다 갈 수도 있었겠지만 빠듯한 여행을 할 생각이 없었다) 

뮌헨은 포기하고 바르셀로나에서 5일 동안 머물기로 했다.


스페인을 사랑하는 친구는 구경할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딱히 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가우디도, 가우디의 구엘공원(Parque Güell)도, 파밀리에 대성당(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물론 파밀리에 대성당의 웅장함에 압도되긴 했다) 

몬주익 언덕(Montjuic)에 올라 내려다본 바르셀로나의 전경은 멋들어졌고, 낯선 미국 학생들과 함께 거닐었던 바르셀로네타 해변(Playa de la Barceloneta)은 아름다웠다. 그래도 나에게 특별한 여행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 있다. 람블라스 거리(Las Ramblas)에 있던 보케리아 시장(Boqueria Market)이 그곳이다.


여행 전 바르셀로나를 구경하고 싶다고 한 건 친구였지만 이동 편 티켓을 예약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여행 경로를 계획한 건 나였다. 내가 그런 일을 좋아한다거나 잘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단지 그 친구가 나보다 더 못하기 때문이었다. 계획 세우기, 미리 준비하기 따위를 귀찮아하는 나에게 있어서 숙소 예약 조건은 단 하나였다.

'번화가와 가까울 것.'

람블라스 거리 초입부에 있는 작은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5일 동안 나는 매일 람블라스, 그 거리를 걸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혼자 밖으로 나왔다. 보케리아 시장에 문이 닫히기 전에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람블라스 거리 어디쯤에 있다는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걸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지도를 잘 안 본다.) 10여 분을 걸어 시장 입구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시장 입구는 아담했다. 붐비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도 없었다. 늦었다. 다시 친구를 만나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스페인에서의 첫 끼니였지만 특별히 남은 기억이 없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쯤 눈이 떠졌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깨어버린 비극적인 상황. 잠을 깨기 위해 얼른 씻고, 혼자 숙소 밖으로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람블라스 거리를 걷다가 어제 구경 못한 보케리아 시장을 보기로 했다.

우선 시장 입구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다시 보니 '바르셀로나' 혹은 '카탈루냐'라는 한글 모양과 어울릴 것만 같은 무늬와 색들로 꾸며진 입구가 꽤 예뻤다. 비릿한 생선 냄새를 맡으며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장이 열린 지 얼마 안 된 시간이었지만 시장에는 활기는 넘쳤다. 우선 한 바퀴 대충 둘러보고, 시장 구석 어디쯤 있던 과일 과게에서 컵과일을 하나 샀다. 아침 대용으로 과일을 먹으며 본격적으로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재래시장 특유의 활력은 어느 지역을 가나 닮아있다. 가판대 앞에선 손님들은 흥정을 한다. 가벼운 실랑이도 오간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 비릿한 생선 냄새와 붉은 조명 아래에 진열되어 있는 고기 덩어리들. 왠지 낯익은 장면들 너머로 이곳이 유럽의 시장임을 확인시켜주는 코너가 등장했다. 처음으로 발길을 멈추었던 곳은 살라미를 파는 곳이었다. 육류, 특히 소시지에 대해서 무지한 나는 살라미라는 것을 유럽여행 가서 처음 알았다. 얼핏 보기엔 그냥 소시지처럼 생겼는데 뭔가 지방이 더 많아 보이는 게 '저것 참 느끼하겠다' 싶었다. 매장 천장에 메달아 놓은 살라미를 몇 장 찍고, 미리 공부해간 어색한 스페인어로 사장님께 말했다.

"Gracias"

사진 촬영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 또는 혹시 제가 사진 찍어도 되겠냐를 묻고 싶었지만 그 모든 마음을 담아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런데 사장님이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에스파냐어로 뭐라 말했다. 곧이어 손가락을 높이 들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살라미가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Gracias'를 말하고 샌드위치 가게로 옮겼다.


어차피 아침도 먹어야 하니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기로 했다.

"This one"

짧디 짧은 영어로 살라미가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하나 골랐다. 배고픔에 얼른 한입 베어 무는데 빵이 참 딱딱했다. 늘 먹던 국내 제과점의 빵과는 차원이 다른 질감. 그리고 곧 따라오는 살라미 특유한 향과 짠맛, 초면부터 알아봤던 기름진 느낌까지. 살라미와의 초면에 입안에서 낯선 향이 가득해져 가는데, 때마침 시장도 점점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저녁에 숙소에 돌아가 맥주와 함께 먹을 납작 복숭아를 몇 개를 사들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보케리아 시장으로 향했다. 전날과 같이 과일컵을 하나 사서 먹으며 시장을 구경했다. 이번엔 색색의 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과일맛 나는 젤리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바르셀로나에 머무르는 모든 날을 보케리아 시장에서 시작했다.


나의 첫 유럽여행은 보케리아 시장에서 시작해서 에펠탑으로 끝났다.

에펠탑은 내 오랜 짝사랑과의 만남이었다. 항상 에펠탑과 첫 만남을 상상하며 기대를 키워왔고, 처음 마주하는 순간 에펠탑은 다행히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저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그를 향한 내 사랑은 혼자만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애정이었다. 게다가 에펠탑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경쟁자가 너무 많다.

보케리아 시장은 우연히 만난 운명 같은 사랑이었다. 시장 특유의 활기 넘치는 에너지가 좋았고,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에스파냐어도 왠지 즐거웠고, 시장에 들를 때마다 꼭 사 먹었던 과일이 주는 상큼함에 행복했다. 나 혼자 애정을 보이는 게 아니라 시장도 나에게 애정 어린 에너지를 나눠주는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는 원치 않았던 여행지였지만, 그곳에 시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내 첫 유럽여행의 시작은 꽤나 신나게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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