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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격한 여행자 Dec 20. 2021

일본 레지던스에서 마시는 새벽 커피

하루 한잔이 너무 소중하다

*뉴스레터 끼니로그의 '내가 사랑한 한 끼' 연재로 출고했던 글을 수정하여 다시 게시한 것입니다. 끼니로그를 구독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에 식생활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유난히 일찍 자려고 노력하는 밤이 있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은 날이면 그렇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 시라도 빨리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으로 변해버려 오후 2시가 넘어가면 수면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하게 됐다. 그래서 커피가 너무 고픈 밤이면 얼른 잠들어버린다.


 “커피 더블샷에 샷 추가해주시고요. 얼음은 빼지 말고 톨 컵에 담아주세요.”


 메뉴판에는 없는 더블샷은 에스프레소 샷 2개에 우유와 크림, 시럽을 넣고 얼음과 함께 흔들어서 칵테일처럼 만든 찬 음료다. 우유가 아주 소량만 들어가 쌉쌀한 맛이 강하지만, 시럽과 크림도 덜 희석돼 ‘단쓴단쓴’한 게 매력이다. 정해진 제조 법대로라면 용량에 딱 맞는 전용 잔에 담기지만, 샷 하나를 추가하고 원래 빼고 주는 얼음도 같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톨 사이즈 컵에 달라고 주문한다.


 10여 년 전 즐겨 마시던 나만의 에너지 음료 ‘쓰리샷’의 레시피. 한 모금 들이켜면 전신을 깨우는 카페인의 짜릿함에 중독된다. 일이 많거나 안 되던 날이면 쓰리샷을 시켜놓고 자학 같은 힐링을 했다. 가끔 ‘괜찮겠냐’며 점원의 걱정하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하루 3~5잔씩 커피를 마셔도 위장 건강과 수면의 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젊은 신체였기에 마셔도 좋았다.



교토에선 이노다 커피에서 오리지널을 한잔 마셔야 여행이 시작됐다.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으려나...

  노동을 위해선 비자발적 수면 방지였지만 여행지에선 자발적 수면 방지를 위해 많은 커피를 마시고는 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발길 닿는 곳에 어디나 작은 킷사텐을 만난다. 우연히 들어간 곳에서 난생처음 사이폰으로 추출한 커피를 맛보기도 했고,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의 융드립 커피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석 잔, 넉 잔을 마시고선 밤에 잠이 안 오면? 안 자면 되는 것. 골목길 다방은 못참지.


 광란의 커피 파티는 직장인이라면 통과 의례처럼 겪는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리면서 막을 내렸다. 위 한쪽이 뻐근해지면서 신물이 올라오는 증상은 아무리 옅어도 커피 한 방울이면 재발됐다. 두통과 무기력증이라는 금단 현상에도 정상적 섭식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커피를 끊었다. 지금은 많이 회복돼 하루 1.5잔 정도, 예전 커피양 기준 3분의 1도 안 되는 커피는 마실 수 있다. 매일매일이 감질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길게 오래 마시려면 어쩔 수 없다.


  2년 넘게 여행을 못 가고는 있지만 이미 2019년 마지막 도쿄에서도 하루 두 잔 이상은 무리였고, 잠을 자지 않고는 다음 날 일정이 불가능한 상태였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아라시야마 카페에서 맛본 사이퐁 커피와 모닝빵 세트(왼쪽) 아사쿠사 골목길에서 우연히 들어간 아재들이 방앗간 같았던 킷사텐. 고교 야구를 배경음으로 350엔 커피를 홀짝


 제대로 된 한 잔을 마주하는 시간은 그래서 귀하다. 커피를 마시려고 일찍 눈을 뜬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도구를 준비한다. 드리퍼, 거름지, 머그잔 그리고 좋아하는 원두. 몸에 새겨진 매뉴얼이 계산하지 않아도 적량의 원두를 덜어 거름지를 끼운 드리퍼에 쏟는다. 끓인 물을 원두 위로 원을 그리며 조금씩 조금씩 부으면 주방에서 시작된 향긋함이 거실까지 퍼진다. 향과 맛이 충분히 퍼질 수 있도록 한 모금씩 아끼고 아껴서 목으로 넘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이상한 목소리로 이른 아침 커피 한 잔을 쥐고 나누는 대화. 밤새 집안의 공기와 온도, 오늘의 예상 날씨, 어제 먹다 남은 잔반 등 시시콜콜한 거리들. 대화의 상대는 가족 혹은 가족만큼 가까운 내 사람. 그 존재가 주는 든든함과 커피 향이 어우러져 더 들뜨게 되는 기묘한 아침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묵는 우리의 고정 숙소, 레지던스에 준비되어 있는 모닝 커피를 위한 도구들. 


  한때 커피를 다루는 걸 직업으로 뒀던 친구와 같이 맞이하는 아침이면 눈은 더 빨리 떠진다. 같은 도구, 같은 동작인데 맛과 향은 배가 되기 때문에. 숙소는 되도록이면 주방에 붙어있는 레지던스로. 주전자와 식기가 잘 갖춰진 곳에서 우리의 아침을 준비해주는 ‘모닝 에인절’. 첫날 짐을 풀고 돌아올 때면 그 지역에서 먹고 싶었던, 맛있는 강배전의 원두를 챙겨 사온다. 다음 날 아침. 의식처럼 이어지는 동작으로 커피 내리는 에인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묻는다.


  “왜 물을 그렇게 조금만 넣어?” 

  “처음에 확 부으면 물길이 생겨서 커피가 고루 안 내려져.” 

  “거름지는 왜 먼저 헹궈?” 

  “종이 냄새 안 나게.” 

  “커피가 더 안 우러날 때까지 물 넣는 거야?”

  “아니, 적당히 됐으면 그만 우리고 차라리 내린 커피에 물을 타서 먹으면 더 맛있어.”

  “게이샤 원두는 값만 비싸고 입맛에도 안 맞고 위만 아프더라?”

  “위가 안 좋으니까 산미에 예민할 수도 있어.”

  “탄 맛 나는 게 맛있는 거 아냐?”

  “한국 사람들은 강배전을 좋아하지.”

  “1인분은 원두 몇 g이야?”

  “7g인데도 있고, 12g인데도 있고 자기 기준이 있지. 넌 3g이 좋다며!”


 한 잔을 음미하는 동안 연쇄 질문마의 질문에도 꼬박꼬박 답해주는 친구와 함께 마시는 커피는 정말 행복한 맛이다. 쓰리샷을 나누던 커피 메이트. 이번 블로그 헤드 사진으로 쓰기는 했지만, 블루보틀의 신맛은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맛 메이트. 이제 하루 한 잔이 소중해진 것까지 닮은 동년배, 오래오래 같이 마십시다.



*뉴스레터 끼니로그의 '내가 사랑한 한 끼' 연재로 출고했던 글을 수정하여 다시 게시한 것입니다. 끼니로그를 구독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에 식생활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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