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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Mar 14. 2024

시간 반죽.

House Atreides - 한스 짐머

아빠. 아빠는 왜 나를 낳았어?



이렇게 예쁜 애 나올 줄 알고 낳았지.


음… 다른 대답 없어?



사람들이 애를 낳는 많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복합적인 이유로 낳은 건가?


아냐, 그냥. 내 때는 다 그렇게 아이를 낳으니까 나도 낳은 거지 뭐.


*

*

*


* Arrivial


초대권이 주어졌다. 초대장에는 직선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 오후 내내 잠들어 있어야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하늘도 맑고 기분이 말끔해서 다 용서될 것 같다.


느리게, 더 느리게, 더 느리게 시계 태엽을 뒤로 감는다. 시간 덩어리를 반죽해서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길게 늘였다가 반으로 접고, 길게 늘였다가 반으로 접는다. 길게 늘였다가 반으로 접기를 셀 수 없이 반복했고, 아주 딱딱한 덩어리는 길게 뽑힌 비단실 뭉치가 되었다. 비단뭉치부터는 좀 더 조심성 있게 다뤄야 한다. 차분하고 섬세한 동작으로 길게 늘이고, 다시 반으로 접기를 비단뭉치가 액체가 되어 흐를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점성 있고 유동성 있는 것으로 변한 시간 덩어리는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시간은 발밑에 뚝뚝 흘러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


눈을 감는다.


하나,

둘,

셋…


무언가 온전히 변화하고 있다. 밟고 있던 땅의 냄새가 바뀌고 유대감을 잃었다.


전체가 사라지고 일부는 다시 전체가 되었다.



* Invitation


한근과 옥순에게서 아이가 태어났다.


옥순은 응애, 응애 하는 아기를 받아 들었다.

한근은 아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산부인과에 잘못 찾아온 듯한 중절모를 쓴 노인이 힐끗, 복도 너머에서 옥순을 쳐다본다. 정확히는, 옥순의 아이를.


-


자네. 초대는 언제든 거절할 수 있다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당신은 초대받은 입장으로써 본 여행을 즐긴다면 자네에게 좋은 추억이 될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시간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네. 지금 우리가 했던 건 시간을 늘리고, 또 늘여서 순간을 찰나로, 쪼개고 또 쪼개어 직선의 단부에 서있게 된 것뿐이지.

자네에겐 그 어떤 임무도 없다네. 주어졌으니 받아들이거나, 흘러 보내거나. 시간을 반죽할 때부터, 이미 자네는 선택한 셈이지, 받아들이기로.


의미에 몰두하지 말고 전체가 된 감각을 누려보시게나. 언제나 일부로써 존재했으니, 전체가, 여행자가 된 것을 축하하네.


자네, 벌써 자네만의 것이 생긴 것 같군. 바라는 것도 많고, 끌리는 것도 생기고 밀어내는 것도… 무엇보다 전부가 될 ‘몸’이 생겼구려.



* Identity


나는 그와 그녀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유전으로 설명하고는 하는데, 그의 일부와 그녀의 일부를 내가 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다른 그와 그녀의 일부를 담고 있고, 그녀 역시 또 다른 그와 그녀의 일부를 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결국 나는 그와 그녀를 대표하는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눈빛, 파형, 행동양식, 도덕관념, 신념….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와 그녀로 상정되는, 그전에 또 다른 그와 그녀, 그 모든 그와 그녀의 존재를.

그리고 이해했다.


그와 그녀는 나를 다정한 파형으로 불렀다. ‘소라.’

소라. 소라였다. 소라…



* Stay


그녀의 등에 거북이 등딱지처럼 달라붙어서 온기를 느꼈다. 그는 촘촘한 빗으로 그를 닮은 검은 머리칼을 빗어줬다.

그녀와 그는 매일 나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안아주었다.


어느새 나는 나의 전부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와 그녀는 비슷한 파형을 가지고 있었고, 함께 있을 때 만들어지는 울림이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 그와 그녀는 속도가 참 잘 맞았다. 심장이 뛰는 속도부터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어느 때는 그가 두 바퀴 돌면 그녀는 열 바퀴를 돌았는데, 그의 궤도와 그녀의 궤도는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스칠 듯이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고, 궤도에서 탈출하는 한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곡예하듯 다시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 Farewell


그녀와 그의 궤도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항상 같은 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넓어지는 건지 아니면 그들이 작아지고 있는 건지 점점 그들의 속도는 빨라지고, 하나의 점에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충돌.



- 옥순이. 옥순… 보고 싶을 때 어떡하지.


소라는 옥순의 귀에 속삭인다.


- 먼저 가 있어, 엄마. 엄마가 초대해 준 이곳이 좀 쓸쓸해졌지만 나는 좀 더 즐기다가 갈게. 그때 그랬잖아, 우린 모두 지구별 여행자라고. 엄마는 또 다른 전체가 되었겠네.


옥순이 떠나고 한근은 열심히 농사지어 소라를 먹이고, 재우고, 가르쳤다.

그렇게 소라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 소라는 있는 것을 누리며 자족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


옥순이 떠난 지 15년이 되던 해, 한근은 문득… 자신이 없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소라에게 보낼 마늘을 다듬었는데 냉장고 구석에 깐 마늘 2kg가 세 통이 있었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순간… 여기가 어디지.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기억이 담겨있는 사진첩을 보는데 우리 집 사진첩이 아닌 줄 알았다. 옥순의 얼굴.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소라는 기억을 잃어가는 한근을 안아준다.

온기. 온기는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한근의 육신은 아직 지구에 남아있을지언정 정신은 먼저 궤도 밖으로 이탈했다. 기억하고 싶은 누군가를 향해 떠난 우주여행일지도 모른다, 소라는 중얼거렸다.


소라는 한근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안아줬다.

그렇게 지구가 태양을 여섯 번 돌고

한근은 잠들듯이, 전체로 돌아갔다.



* Departure


소라는 이 감각을 잘 안다.

경험해 봐서가 아니라, 한근을 기억해서 안다.

자신을 잃어가는 감각.

내가 알던 나의 전부가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져서 형상을 잃고 규칙을 벗어나 여행의 끝을 알리는 감각.


매일. 그와 그녀는 나를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안아줬지.

다정했어.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해서 슬픈 게 아니라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쉬울 뿐이야.

생각해 보면 기억을 잃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중인 거야.


수도꼭지의 물방울이 수면 위로 톡, 떨어졌다.

나비가 날아오른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흩날려 은행나무 아래 자리 잡는다…


흘러내리던 모든 찰나가 다시 하나의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시간이 흘러내렸고, 아래서부터 천천히 굳어간 시간입자는 다시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더 이상 소라가 아닌 소라였던 무언가는 빙긋 웃는다. 여행. 잘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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