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 검정치마
할머니는 작년 초겨울에 치매판정을 받으셨다. 이따금씩 가까운 과거의 기억을 잊곤 하신다.
할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편마비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셨고, 반복된 폐렴으로 4월 마지막 주에 돌아가셨다.
딸 둘, 아들 둘, 남편과 살던 집에서 남편과 당신만이 살던 집으로 이십 년, 그리고 이제 당신만이 남아있는 집으로.
할머니는 종종 할아버지가 어딜 가셨는데 지난밤부터 돌아오시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네 아버지 어디 갔는지 알아보라고 물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슬픔을 가리기 위해 과장된 다정한 목소리로 ‘엄마, 아버지 지난 9월에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잖아, 기억나? 여기에 있고 잘 계셔.‘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긴 했다.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가족 2명씩만 병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우애 있게 지내라.’라는 말을 남기셨다.
*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차라리 버러지 같았다면 덜 그리워했을까.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를 직접 간호하지 못한 것에 크게 상심하셨다. 그리고 미안해하셨다.
새해가 밝아오는 날에도 할아버지의 기운은 점점 지고 있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오면 미음이라도 직접 쒀 드리고 싶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이모, 엄마, 삼촌들의 지난한 상의 끝에 결국 할아버지는 계속 병원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셨다. 간병인을 고용할 때 엄마는 할아버지가 이토록 많은 비용이 든다는 걸 안다면 기함하셨을 거라고, ‘우리 아버지는 모르실 거야, 아마.‘라고 이야기하셨다. 다행히 엄마는 성실한 하루하루를 쌓아와서 할아버지의 병원비, 간병비를 부담할 수 있었다.
*
4월 초,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할아버지를 모시기로, 그렇게 됐다. 할아버지는 간병온 자식들, 손주들을 느낄 수 있었다. 흐릿하지만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침대에서 마비되지 않은 오른쪽 다리만 접었다, 폈다를 아주 느리게, 1초를 가장 길게 늘이는 것처럼 움직이셨다.
*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날은 할머니와 삼촌 가족들, 엄마와 아빠가 오전에 다 함께 할아버지를 뵈러 간 날이었다.
해가 저물고, 엄마는 긴 외출을 마친 뒤 욕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관계, 생각,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는 급격한 변화 앞에서 엄마는 많이 지쳐있었다. 엄마는 지친 하루를 뜨끈한 욕조에서 마무리하곤 했다.
나는 소파에 누워 추리 예능을 보고 있었는데 엄마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화장실 문을 열어 욕조에 있는 엄마에게 핸드폰을 건넸고, 엄마는 몇 분 지나지 않아 금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왔다. 초조하게 머리를 말리는 엄마를 보며 같이 가야겠다는 걸 직감했다.
*
밤 열 시, 택시를 타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이 순간이 마지막일까, 마음이 급했다.
담당 숙직 의사로부터 가족 모두가 올 필요는 없지만 가족 몇 분만 오셔서 지금, 할아버지를 보셨으면 좋겠다는 전화였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엄마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었고, 전화 온 지 20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이 규정한 보호장구, 그러니까 비닐옷과 비닐장갑, 마스크를 쓰고 2층에 있는 할아버지 병실 앞까지 갔다. 목구멍 깊은 데서 가래가 끓는데 그걸 혼자 뱉어내지 못해서 나는 걸쭉한 소리, 호흡기에서 나는 쉭쉭 바람소리,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는 기구의 잔잔한 백색소음. 복도에는 최소한의 빛만 남겨두고 있었다.
*
할아버지는 고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발을 조심스럽게 잡았는데 차갑고 딱딱했다.
- 아버지, 나 왔어요. 둘째 딸.
할아버지는 고개를 아주, 아주 느리게 오른쪽으로 돌려서 엄마를 쳐다봤다. 눈도 아주 희미하게 뜨고 있었지만, 분명히 고개는 엄마를 향했다.
- 아버지 힘드시죠. 지금은 아프고 힘들어도 곧 편안해지실 거예요.
그리고 엄마는 할아버지와의 기억들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대놓고 다정하기보다 항상 같은 온도로 자식들을 내리쬐는 분이었다.
*
나는 할아버지 왼편에서 인사를 했다. 오늘은 4월 말이고, 할아버지 쓰러지실 땐 가을이었는데 벌써 봄이 왔다고, 벚꽃도 펴있고 지금 한창 농사 지을 준비 하고 있다고.
어릴 때 나를 돌봐주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작은 손수레에 작은 다섯 살 배기를 태우고 논길을 걸어가는 할아버지.
그땐, 그리고 자라올 땐 나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은 할아버지인 줄 몰랐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사랑을 주고 보살펴줘서 무탈하게 잘 자랄 수 있었다고,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엄마는 할머니 걱정하지 말라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 우리 네 형제가 어머니 돌아가면서 잘 돌보고 모실테니 걱정 말고 아버지 좋은 곳 가세요.
그리고, 혼자 먼저 가시지 말고 가까운 데에 살고 있으니까 꼭, 가실 때는 나한테 연락 주기, 약속.
할아버지 새끼손가락과 엄마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할아버지 발치쯤, 간이 의자에 앉아 엎드려있다가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모임을 마치고 곧장 요양병원으로 달려온 아빠와 그날 할아버지를 뵙지 못한 삼촌과 새벽까지 병실을 지켰다.
삼촌은 아침까지 할아버지 곁을 지킬 테니까 엄마와 아빠는 집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오전 11시쯤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은 아들이 지켰다.
이모, 엄마는 전화로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
할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고모는 장례식에 오자마자 할머니를 찾으시고, 할머니 두 손을 꼭 잡고 붉어진 눈시울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고모의 눈을 보고 함께 붉어졌다.
밥도 잘 드셔야지요, 씩씩하게.
*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그날, 그다음 날 함께 보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셋째 날 다시 당신의 집으로 가셨다.
*
그 주말에 네 형제는 집에 모여서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돈했다.
할머니의 안방에는 돌침대가 있다. 돌침대 머리맡에는 장례 때 빽빽한 국화 가운데에 놓여있던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주무시지 않고 옛날 삼촌이 쓰던 방을 쓰시고 있다.
*
주말이면 할머니를 찾아가서 같이 드라이브를 했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할머니 집 안에서 고요히 앉아있으면, 할머니는 가끔 슬픔을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끅, 끅, 숨소리를 내셨다.
*
며칠 전에는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동네 할머니들에게서 할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엄마에게 화를 내셨다. 나는 할머니가 화내는 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어떻게 나한테 비밀로 할 수 있느냐고 엄마에게, 이모에게 화를 냈다. 엄마는 당황했지만 다정하게 차근히 설명했다.
엄마, 우리 같이 아버지 보내드렸잖아. 기억나?
*
할머니의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다. 장례 이후로 더 들어갔다. 쓸쓸한 눈으로 홀로 지키게 된 대문 앞에서, 엄마와 아빠, 나를 배웅하던 저녁에서 할머니는 또다시 잊게 되는 시간이 오고 다시 또다시 혼자 있는 밤에 의문을 가지고 당신은 어디에 있는지,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건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새벽을 만날 것이다.
할머니 집 안방 창문 너머로 새가 지저귀었다. 한참 빨랫줄 위에 앉아 지저귀는데 꽤 오래, 오래였다.
할아버지인가, 싶어서 내심 엄마와 할머니에게 새가 창문 너머에서 한참 지저귄다고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