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자린이 부부 제주도 자전거 여행기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했다. 아침식사는 어젯밤에 남은 치킨을 몽땅 해치우고는 가다가 배고프면 전망 좋은 카페에서 보충하기로 했다. 둘째 날, 목표 종점은 ‘성산일출봉 인증센터’, 거리를 검색해 보니 80km, 어제보다는 조금 짧은 거리였다. 하룻밤 쉬어서 체력도 보충하였으니 호기롭게 출발을 외치며 안장에 올라탔다. 그런데 으아악~~~ 엉덩이가 말이 아니었다. 내 엉덩이를 어떻게 하나ㅠㅠ 엉덩이가 아파도 너무 아팠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가 살며시 놓았다가 다시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였다. 결국은 이를 굳게 깨물고 고통을 지그시 눌러 참으며 달렸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내리막길이 나오면 엉덩이를 들고 탔다. 어느 시점부턴가 그토록 아프던 엉덩이도 단련이 되니 고통을 모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둘째 날 달리는 구간은 서귀포의 남쪽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구간이다. 겨울과 봄철의 제주는 바람이 대부분 중국 대륙이 있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북풍이 서귀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라산을 넘어야 한다. 한라산은 서귀포의 바람막이나 다름없다. 그런 고마운 한라산 덕택에 둘째 날은 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달리는 동안 첫째 날처럼 끝이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은 없었지만 구간구간에 짧은 급경사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자전거 도로가 내륙으로 달리다가 다시 해안가 쪽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해안가 끝으로 다다라서 좌회전을 하자마자 멋진 전망이 펼쳐졌다. 커피 한 잔이 생각날 만큼 멋진 풍광이었다. 카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길 옆쪽으로 카페가 서 너 곳 자리 잡고 있었다. 잠시 쉬며 커피 한잔하고 가기로 했다. 카페들을 비교하며 어느 가게로 들어갈지 살펴본 다음 한곳을 골라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니 향긋한 커피 향이 가득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손님은 없었다. 남쪽 방향으로 탁 트인 통창으로 물결치는 파도가 햇볕에 반짝이며 은빛으로 출렁인다. 커피 한 잔과 멋진 경관이 이토록 달콤할 수 있을까? 바다의 은빛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을 멍 때렸다.
여행을 떠나올 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은 어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제대로 힐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링이 지나쳤는지 달콤한 여유를 너무 즐기다 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결국 둘 다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났다. 몇 분간의 졸음이라도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휴식이 길어지면 몸이 더 늘어지며 피곤이 몰려오는 법, 적당히 여유를 즐긴 다음 다시 출발했다. 해안가 도로가 바위들로 막히면서 길이 다시 내륙으로 들어간다. 내륙으로 들어서자 오르막 내리막이 몇 차례에 걸쳐 번갈아 나타나며 휴식으로 저축해 놓은 체력을 일찌감치 다 방전하게 만들었다. 엉덩이를 들고 댄싱을 하며 힘겹게 언덕배기를 올라가는 데 너무 가팔라서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서 오르고 있었다.
뒤따르는 와이프가 잘 오고 있나 보려고 고개를 뒤로 돌리며 돌아서는데, 도로 옆 돌담 너머로 초록빛 물결이 넘실넘실 거리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순간 “우와~~~~” 하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저게 뭐지? 잡초인가? 잔디인가?’ 아니다. 자세히 보니 보리밭이었다. 보리가 자라서 바람에 파도처럼 넘실넘실 대며 출렁이고 있었다. 초록빛 물결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봄이 왔다고 손짓하며 나를 반기는 듯했다. 뒤늦게 낑낑대며 올라오는 와이프에게 “자갸! 뒤 좀 돌아봐 봐”라고 했더니 “와~~~ 아~~~~” 하며 와이프도 탄성을 터트린다. 싱그럽기 그지없는 풍경이 잠시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둘이서 연신 셀카를 찍어 댔다. 기억은 흐려지고 남는 건 사진뿐인데, 어찌 이런 멋진 순간을 안 남기고 갈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푸른 보리밭에 매료되었다가 다시 또 출발하였다.
‘쇠소깍 인증센터’까지 가는 길은 정말 아름다운 길이 이어졌다. 해안가를 지그재그로 돌다가 어느 순간은 작은 마을로 들어가더니 골목골목을 거치게 되는 코스가 나왔다.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돌담 너머로 힐끗힐끗 보기도 하며 지나갔다. 정감 가는 구간이었다. 그러다가 ‘쇠소깍 인증센터’에 도착, 인증 도장을 찍고 잠시 쉬는데 한 부류의 자전거 부대가 도착한다. 우리처럼 자전거 일주를 하는 사람들인데 자전거 동호회에서 왔단다. 그들은 우리 부부와 타고 온 자전거를 번갈아 보더니 금방 초보인지 알아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한다. 그리곤 그들은 우리들보다 앞서서 출발했다.
겨울철이면 잎은 떨어지고 빨간 열매만 남아서 더욱 아름답게 변하는 먼나무
곧이어 우리도 출발했다. 쇠소깍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낮 봄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길 양편으로 귤 과수원이 쭈욱 이어져 있었다. 귤 밭의 경사면을 낑낑대며 가로지르고 있는데 햇빛이 따갑게 느껴지더니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이었다. 완전 탈진 상태였다. 도저히 힘이 없어서 와이프에게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고 하고서는 과수원 입구 아스팔트 길바닥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큰 대자로 누워서 뻗어 있으니 와이프가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 씌워준다. 따가운 봄볕에 얼굴이 타면 안 된단다. 그러면서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라는 속담이 있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봄볕은 얼굴에 기미가 끼인 단다. 와이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연 이틀 피로가 쌓이니 첫날보다 더 빨리 지치며 탈진 상태가 왔던 것이다. 한참을 그 상태로 쉬면서 30여 분 가량 짧은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힘은 조금 생겨났지만, 이렇게 계속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건가? 순간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근데 나보다 멀쩡한 아내를 보고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서는 출발했다. 이날 목표 지점인 성산 일출봉까지는 아직도 40km 정도의 거리가 남아있었다. 우선 중간지점인 표선 해변까지 가야만 했다. 다시 도로가 해안가로 이어지며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게 되었다. 짙푸른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달리니 싱그러운 바람에 바다 내음이 물씬 코끝을 스친다. 싱그러운 바람에 피로도 함께 날아가는 듯했다.
시계는 오후 4시경,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그런데 배는 고파서 진작부터 시장기가 돌던 차였다. 자전거 도로는 다시 해안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시 해안가로 나오는 순간, 초입에 ‘세화리 해녀의 집’이라는 가게가 보였다. 벽에 적힌 메뉴를 짧은 찰나에 스캔하며 지나치는 데 ‘물회’라는 글자가 보였다. 곧바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뒤에 따라오는 와이프에게 “물회 먹고 가자.”라고 외쳤더니 물회를 좋아하는 와이프가 마다할 리 없었다. ‘갈 길은 아직 멀지만 먹어야 힘이 나지 않겠나.’ 이건 내 생각이었고, 와이프 생각은 좀 더 복잡했던 것 같다. ‘오늘 가야 할 길이 멀었는데 이 껌딱지가 왜 이렇게 힘을 못 쓰지. 이러다가 오늘 목표지점까지 못 가는 것 아냐.’ 아마 이런 생각으로 복잡했으리라. 예상대로 와이프도 좋단다.
가게에 들어가니 늦은 점심시간이라 가게가 한가했다. 물회 한 사발과 성게미역국을 시켰는데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전복과 싱싱한 횟감의 푸짐한 물회는 맛이 일품이었다. 시장기로 맛이 있었는지 원래 맛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성게미역국과 물회를 후루루 쩝쩝, 금방 해치웠다. 그리고 잠시 해안가에 앉아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으로 피로를 풀었다. 아~~~! 믹스커피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ㅎㅎ
물회 한 그릇을 먹고 출발하니 다시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힘이 나니 둘이서 얘기 나눌 힘도 생겨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달렸다. 남동쪽 해안선은 아름다운 곳이 많았다. 둘이서 셀카도 찍고 쉬엄쉬엄 경치를 즐기다가 또 달렸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멋진 풍경에 즐거운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게 해 준 와이프가 고마웠다. 조금 전에 탈진했을 때는 후회스러웠지만 ㅎㅎ ‘자전거도 기분 좋게 달리니 피로가 덜 쌓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저 멀리 표선 앞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바닷가 끝에 등대 하나가 보인다. 예전에 드라마 ‘아이리스’ 마지막 편에서 김태희가 행복에 젖은 모습으로 이병헌을 기다리던 그 등대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이병헌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저격수의 총탄에 숨을 거둔 뒤였다. 드라마 아이리스 이후 표선에 올 때면 그 드라마가 항상 생각나게 된다.
표선 인증센터에서 인증을 한 다음, 잠시 벤치에 앉아 남은 일정도 점검하면서 달달한 초콜릿 바로 에너지를 보충하였다. 최종 목적지인 ‘성산일출봉 인증센터’까지의 거리는 22km, 에너지 빵빵한 상태라면 한 시간이면 갈 거리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이기에 2시간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며 다시 힘을 내어 달렸다. 그때가 벌써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목적지에 도착하여 숙소를 잡고, 씻고, 저녁을 먹으려면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달리는 방향이 북쪽으로 바뀐다. 바람이 맞바람으로 바뀐다는 얘기이다. 더군다나 표선은 제주도 동쪽 끝이라서 한라산이 바람을 막아주지도 못한다.
바람이 점점 세지면서 속도는 점점 느려지며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숨은 턱밑까지 헉헉대기 일쑤였다. 뒤따라오는 와이프가 잘 오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앞서갔다. 바람이 앞에서 불 때는 나란히 가는 것보다 일자로 늘어서서 달리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아서 한결 달리기가 쉽다. 그런데 와이프가 너무 뒤처져 있어서 그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와이프도 많이 지쳐 보였다. 그 당시 표선에서 성산일출봉 구간은 곳곳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파인 곳이 많았고 직선인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서 가게 만드는 구간이 이어졌다. 그런 곳은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없어서 자전거를 끌며 걷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더 걸렸다.
겨우겨우 ‘성산일출봉 인증센터’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부랴부랴 인증 도장을 꽝 찍고 나니, 인증센터 뒤쪽 하늘 위로 펼쳐진 하늘이 기가 막히다. 하늘이 붉게 불타고 있었다. 불타는 석양이 환상이었다. 석양이 지는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어디에 숙소를 잡을 것인지가 걱정이었다. 재빨리 어제 사용한 ‘데일리 호텔’, ‘야놀자’ 앱을 켰다. 그런데 앱에 나타나는 숙소가 대부분 멀리 있었다. 더 이상 몇 km를 달리기는 무리였다. 어느 숙소이든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을 찾으려고 몇 번을 검색해도 적당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사방을 둘러보니 다리 건너편으로 도로에 접한 큰 호텔이 하나 보였다. ‘코업시티 호텔 성산’ 재빨리 호텔 이름으로 앱을 다시 검색하였다. 그랬더니 예약이 가능하다고 뜬다. 가격을 확인하는데 29,000원! 이게 맞는 건가? 눈을 의심하며 두 번 세 번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아서 직접 호텔로 전화를 했다. 맞는 가격이라고 한다. 대신에 앱으로 예약을 해야만 그 가격이 적용된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바로 앱으로 예약을 하고 다리를 건너갔다.
체크인을 하는데 데스크 직원 왈, “두 분이라서 같은 가격으로 룸을 업그레이드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있나.’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서비스에 어찌할 바 몰라서 그냥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룸으로 들어갔다.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은 제주도 관광업계의 실정을 그제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평상시 가격의 1/3 밖에 안 되는 가격이라도 손님을 끌기 위해서 서비스는 극진할 수밖에 없는 관광업계의 현실이 절실히 느끼는 저녁이었다. 같은 업계에 일하는 사람으로서 코로나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고군분투하는 업계 사람들을 보게 되니 안타깝지 그지없었다.
업그레이드해 준 객실에 들어가니 대만족이었다. 하룻밤만 지내기엔 아까울 정도로 흡족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온몸의 근육이 풀리는 듯 노곤하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을 먹기 위해 나서니 벌써 8시가 가까워졌다. 주위 맛집이라 소문난 집들은 벌써 문을 닫았다. 왜 이리 빨리 닫느냐고 물으니 손님들이 없으니 빨리 닫아야 인건비라도 줄일 것 아니냐며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하는 수없이 뭘 골라서 먹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가게 문이 열린 집을 찾아서 아무거나 먹기로 했다. 삼겹살을 한다는 가게가 하나 보여서 곧바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손님도 있었고 주인장도 ‘어서 오세요’라며 인사를 한다. 그 말을 듣고 서야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삼겹살을 시켰다. 제주도의 돼지고기는 어느 가게를 가든 맛이 있다. 기본 이상은 한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서 배가 고프니 더 맛있었다.
맛난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니 온몸의 근육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듯 해롱해롱 취했다. 내일은 또 어떤 날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면서도 체력이 잘 버텨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옆에 있는 와이프를 보니 벌써 깊이 잠들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몸은 피곤한데 잠은 금방 오지 않아서 맥주 한 캔을 더 마시고 나서야 곯아떨어졌다. 둘째 날도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