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은 다가오고 고민은 늘어만 간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어느 의류회사 광고 카피이다. 문구가 낭만적인 데다가 긴 여운을 주는 카피라서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이 광고를 보며 내게는 언제 저런 아리따운 여자가 나타날까 상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얼마 뒤, 상상으로만 그리던 그 아리따운 여자가 정말로 내게 나타났다. 요술램프 지니가 내 소원을 듣고 있었나 보다. 그때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오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녀는 지금 나랑 함께 자전거를 탄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그 옛날 광고 카피처럼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리따운 그녀는 지금 50대 중반의 아줌마가 되었고, 그녀를 꼬신 나는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뒤덮인 50대 후반의 꼰대 아저씨로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직장인이다. 청춘시절의 빛나던 아름다움은 지난 세월이 다 앗아가고 이제 남은 건, 그냥 그저 그런 중년부부의 지루할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앞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게 싫지만 이대로 아무런 변화 없이 간다면 곧 나의 현실이 될 미래의 모습이다.
나의 인생 2막은 그런 지루한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지낼 수는 없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할 인생 2막의 멋진 미래상을 그리고 또 그린다. 인생 2 막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은 곧 다가올 퇴직이다. 그 이후, 나의 삶과 그리고 와이프와 같이 할 중년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 갈까 하는 고민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전자책을 쓰는 시도 또한 변화의 일환이고,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자전거 여행도 우리 부부의 미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찾기 위한 방편의 일환이다. 퇴직 후 생기게 되는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여유 있고, 윤택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인생 2막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내 삶을 종종 되돌아보게 되는데, 우선 지금하고 있는 생활 속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여행 이야기에 앞서 50대 중년의 직장인이 처하게 되는 사회적인 환경 변화와 심리적 갈등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자. 올해로 직장 생활 34년째, 오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잘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 지난 세월에 한 가닥 보람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람보다 더 큰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씁쓸함 이란 아마도 자신이 점점 쓸모 가치가 없어져 가는 데 대한 위축감과 버림받은 것 같은 일말의 묘한 배신감, 그리고 또 모든 권한과 책임을 내려놓는 데서 오는 상실감과 회의감 같은 감정들일 것이다.
직장 내에서 처하는 환경 변화에 따라 주위 사람들이 예전과 같이 대해주지 않는 것 같고, 그런 모습을 보며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감정의 기복은 심해진다. 이런 감정의 기복은 갱년기에 잘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갱년기라고 하면 그래 인정하자. 나는 지금 갱년기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 세대는 소위 MZ 세대들이 말하는 바로 그 꼴사나운 꼰대 모습의 전형이다. 간혹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라떼 레퍼토리’를 풀어 보지만 그럴수록 분위기는 경직되어 가고 존재감은 더욱 외면받는 처지가 되어간다. 직장에서는 그렇게 쓸쓸히 내쳐지며 사라져 가는 존재가 되고 있다.
가정으로 눈을 돌려 보자. 어느덧 결혼 29년째, 연애시절 아리따운 그녀는 지금 여우인지, 사자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우보다는 점점 사자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와 반대로 나는 존재감 잃어가는 늙은 늑대로 사자 앞에서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지난 29년 동안 늑대와 여우는 토끼 같은 두 딸을 얻어서 그런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토끼 두 마리는 이제 어엿한 여인으로 성숙하여 언제든 제 짝을 찾아간다고 하면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두 딸이 모두 떠나간 집을 가끔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급우울 해진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들이 쫓는 행복은 부모가 줄 수 없는 행복인 것을… 제 짝을 찾아 훨훨 날아가서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그런 날이 이제 머지않아 올 것이다. 퇴직은 예정되어 있고, 딸들도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남게 되는 것은 온전히 부부 둘 뿐이다.
이제 초점을 온전히 우리 부부의 이야기로 돌려보자. 퇴직 후 둘만 남게 되는 집은 어쩌면 신혼과 같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볼 것 다 본, 부부의 권태로움이 한없이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결혼 생활 29년째, 그동안 살아오면서 간간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부부간의 애정이나 신의를 깰 만큼의 큰 위기는 없었다. 같이 하는 세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는 적절한 선에서 상대를 배려하며 조절하는 지혜가 생겼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이기에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고민이 똬리를 틀고는 자리를 잡고 있는 걸까? 시시때때로 생각에 잠기며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고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퇴직으로 끊어지게 될 수입에 대한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퇴직으로 늘어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수입은 줄어드는 데 여유시간은 오히려 늘어난다. 여유시간은 곧 돈을 쓰는 시간이다. 즉 돈을 쓰는 시간은 많아지는데 돈이 들어오는 수입은 끊기거나 급격히 줄어들 처지이다. 돈에서만 자유롭다면 여유시간은 얼마든지 재미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없다면 여유시간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자, 권태로움의 지옥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고민의 핵심이다. 고민을 해결할 해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시간이 3년 정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여러 분야를 부지런히 경험해 보고, 또 지혜를 모으며 해법을 찾아가기엔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본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잘 준비해 나간다면 좋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