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못]
“거실에 시계하나 달려고 하는 데 못 하나 박아줘.”
“못이 어디 있지? 신발장에 있나?”
“거실 벽이 시멘트벽이라, 콘크리트 못이 하나 필요한데.”
망치로 대략 위치를 잡고, 콘크리트 못을 박기 시작했다. 못을 세게 박아야지 하고, 망치를 내리쳤다. 못의 머리를 약간 빗나가더니 못을 잡고 있던 엄지 손을 내리쳤다. 아! 내 손이야! 못은 튕겨져 거실 바닥으로 날아갔다.
“아니, 못 하나 못 박어?”
“제길, 애꿎은 내 손만 내리쳤네....”
“그러니, 사진도 잘 못 박지.”
“못 박는 거하고 사진하고 무슨 상관이야?”
“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래.”
“사진은 박는 게 아니고, 찍는 거야. 판화하고 같아. 현실을 찍는 거야.”
공구통에 있는 못 하나를 고르다가 녹슨 못 하나를 발견했다. 산화가 진행되어 녹이 슨 못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시대를 살고 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니까. 사물과 사물간의 경계선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에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도 길게 보자면 얽혀 있기도 하다. 녹이 스는 현상인 ‘산화’와 불타는 현상인 ‘연소’간의 구분이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람들의 마음은 갑자기 분노의 외침이 넘쳐나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로워진다. 연소가 진행되면 그을임과 열이 발생하고, 산화가 진행되면 녹이 발생한다. 연소와 산화의 경계는 모두 애매모호하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서 보는 세상도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죽어간다. 낮이 오고, 밤이 오고,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온다. 산화와 환원은 항상 같이 온다. 이를 화학 용어로는 산화-환원반응(oxidation-reduction reaction; redox reaction)이라고 말한다. 산화는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거나, 전자를 잃는 과정을 말하고, 환원은 물질이 산소를 잃거나, 전자를 얻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에게 중요한 산소는 사람이 숨을 쉴 때 이산화탄소로 바뀌어 나간다. 산소와 전자이동. 그 원리는 무한히 반복된다. 어쩌면 영원회귀(永遠回歸)를 이야기했던 니체나,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말처럼 말이다.
사진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진의 현상과정은 산성(현상)→중성(정지)→알카리성(정착)→중성(물)이다.
사진의 촬영과정 또한 단순함→복잡합→단순함, 전체→부분→전체, 기억→흔적→환기→기억. 전자를 잃고 산소를 얻듯, 산소를 잃고 전자를 얻는 과정이다.
아래층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윗층에서는 밤마다 가구를 옮기는지, 뭘 옮기는지, 그리고 못을 박는지 소리가 들린다. 중간에 껴 있는 내방은 위아래의 소음으로 책 좀 볼려고 하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아파트 층간소음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6년 하남시 신장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아래층에 살던 사람이 윗층의 소음문제에 항의를 했지만 시정되지 않아 윗층의 주민을 흉기로 찌른 범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있었다. 재판은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에게 징역 30년이 선고되었다. 층간 소음의 해결책은 과연 있을까? 방음패널을 설치해 소음을 줄이는 것도 있겠지만, 서로간의 예의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음에 대한 기준은 서로 다를 것이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의 소리나, 자연의 소리는 좋은 백색소음이다. 우리는 평상시에도 많은 생활소음에 묻혀 있고, 잘 느끼지 못하는 소음도 많다. 좋아하는 클래식의 멜로디가 들린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면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들릴 것이다. 아래층에 사는 중학생 아이는 매일 피아노를 두드린다. 멜로디가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피아노 소곡집의 음악이나, 체르니 30번 같은 것은 멜로디가 있어 들을 만하지만, 하농(Charles-Louis Hanon)의 손가락 운동은 같은 것은 거의 소음으로 들린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반복훈련이라고 하지만, 특히 밤에 울리는 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거의 고문에 가깝다. 똑같은 반복된 소리는 못질도 마찬가지다. 피아니스트에게 반복은 중요할 것이다. 사진가에게도 반복 훈련은 중요하다. 사진기를 내려놓은지 시간이 오래되면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삼십년을 넘게 사진을 찍어왔지만 아직도 내 몸안에 체득될려면 멀었다고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진들을 보고, 사진을 찍고 사진에 찌들어 있었지만 나의 생각은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새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고, 항상 뒤처진 생각들이 쌓여만 갔다. 어쩌면 찍는 행위에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줍지 않은 겉모습에 위안을 가지면서, 내가 푼크툼(punctum) 같은 것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2019년 내창형 30주기 기념 전시 기획이 끝나고, 내가 광화문을 사진으로 기록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광장은 조용했다가도 시끄러워졌고, 다시 조용했다가 시끄러워지길 반복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갔지만, 무한 반복을 하는 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가는 듯 하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또 다른 전시를 하나 계획했었다. 서원 선배의 10주기 기일을 맞아 서원 선배의 사진과 내가 그 곳을 다시 찾아가 사진으로 연결해보는 사진전을 기획했다. 사진이 과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할 수 있을까. 사진의 가장 큰 속성은 기억과 진실이 아닐까.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하고, 그 기록은 언젠가 떠난 사람의 마음, 진실이 담겨 있는 충분히 강력한 도구이다. 사진은 그 자체로 존재했던 뭔가(that has been)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정하고, 변경하고, 왜곡해서 바라본다. 그래서 사진은 진실이 아니고 거짓을 이야기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포토샵으로 바꾼 왜곡된 상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이다. 어쨌든 쓰는 이의 용도에 따라 달리 보여지고, 해석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사진이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 어떤 기교나 스타일로 멋져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허구의 가면이지 아닌가. 서원의 사진은 정직한 사진이고, 나도 그런 정직한 사진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전시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근한형이 선뜻 전시를 응원해주었고, 준비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액자를 거는 작업도 천장에서 와이어 줄로 거는 방식이 아닌, 나사못으로 액자를 거는 방식이었다. 근한형이 작업도구를 챙겨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줄맞춤으로 전동드릴로 나사못을 박았다. 액자를 고정하기 위해 사용된 못. 근한형이 없었으면 전시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내가 이런 전시를 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사람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데 하고 싶은 것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네 사진을 찍고 너의 이야기를 해.”
가슴속에 대 못을 박은 것처럼 들리는 소리이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에 못을 수없이 박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가 될 말도, 내 자신에게도. 기억들은 내 팔뚝에 쑤셔 넣은 주사기처럼, 한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