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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Dec 21. 2024

빈센트 반 고흐의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영화 <러빙 빈센트>  2021년

<러빙 빈센트: 임파서블 드림>(2019), <반 고흐>(1992), <반 고흐: 위대한 유산>(2013), <반 고흐>(2018), <고흐, 영원의 문에서>(2019)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2018년 9월 3일에 개봉하고 2018년 11월 16일에 미국에서 정식 개봉된 후 한국에서 2019년에 개봉한 미국, 프랑스 합작 영화. 배우 윌렘 대포는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테오에게... 

색채와 명암은 얼마나 멋진 것이냐. 그것 앞에서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에서 동떨어진 채 지낼 것이다. 모베는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가르쳐주었다. 그 가운데 몇몇은 너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일지 모르니 나중에 가르쳐주마. 언젠가 너와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길 바란다.

모베는 심오한 책을 읽을 때면, 읽은 즉시 작가의 의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시란 아주 심오하고, 파악하기 힘들며, 체계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거든. 그러나 모베는 감수성이 예민한데, 그 감수성이야말로 어떻게 정의를 내리거나 비판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 책을 쓴 작가가 사물을 더 넓고 더 관대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바라보고, 현실을 더 잘 알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에 대한 군소리에는 정말 관심이 없다.

싫든 좋든, 도덕과 부도덕이라는 말은 나를 케이에게로 되돌려놓는다. 아! 그 당시 너에게 사랑은 봄에 딸기를 따는 일과는 다른 것 같다고 쓴 적이 있지. 그건 정말 그렇다.

상상이나 현실 속의 교회의 벽을 생각하면 냉기를 느낀다. 영혼까지 스며드는 그런 냉기를. 그런 치명적인 감정에 압도되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하고 혼자 중얼거려본다. 무언가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여자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사랑하는 여자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누가 아니라 오직 그녀만을 원한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다른 여자에게 가고 싶어하는 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지 않느냐고 혼자 따져보기도 한다.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 뭐가 중요하지? 논리인가, 나 자신인가? 논리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가, 내가 논리를 위해 존재하는가? 비합리적이고 분별 없는 내 성격에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는 것일까? 옳든 그르든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빌어먹을 벽은 나에게는 너무 차갑고, 나는 여자가 필요하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살지 않을 것이고, 살아서도 안 된다. 나는 열정을 가진 남자에 불과하고, 그래서 여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얼어붙든가 돌로 변하거나 할 것이다.

그림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요즘, 작업을 방치해 둔 채 감상에 젖거나 낙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봄에 딸기를 먹는 일도 인생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건 1년 가운데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지금은 가야 할 길이 멀다.

1881년 12월 21일             (P37-40) 

     

〈조용한 싸움〉

테오에게...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좋은 결과가 바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내 데생을 보고 “이건 과거에 그린 그림이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재미로 아팠던 것은 아닌가 보다.

새벽 4시면 잠에서 깨어나 창가에 앉는다. 그리고 목초지와 목수의 작업장, 일터로 나서는 사람들, 들판에서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는 농부들을 스케치하지.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니? 하얀 비둘기 떼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사이의 붉은 타일지붕 위로 날아오르고 있다. 그 너머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초록의 초원이 수백 미터 펼쳐지고, 코로, 반 호이엔 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롭고 조용한 회색 하늘이 보인다.

이른 아침, 지붕과 지붕의 선이 엮어내는 굴곡과 그 사이에 자라는 풀들을 바라본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느끼게 하는 삶의 신호들(날아오르는 새,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저 멀리 아래쪽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작업중인 수채화의 주제다. 네가 그걸 좋아했으면 한다.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어떻게 작업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금처럼 계속 작업할 수만 있다면, 조용히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작은 창문 너머로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을 바라보고, 신념과 사랑으로 그것을 그리는 싸움 말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림 그리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피해갈 생각이다. 그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림 이외의 어떤 것에도 주의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 

1882년 7월 23일        (P67)      

〈더 많은 것을 원하며 모든 것을 잃는 자〉 

테오에게... 

파리의 풍경을 자주 묘사해 준 데 대한 보답으로, 창 너머로 보이는 눈 덮인 마당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다. 집 한 구석의 풍경도 동봉한다. 그 둘은 어느 겨울날 풍경에 대한 두 가지 인상을 담고 있다.

이곳의 풍경은 한 편의 시와 같지만 종이에 옮기는 일은 그냥 바라보는 것처럼 쉽지 않다. 동봉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수채화도 한 점 그렸는데, 기대만큼 생생하고 강렬하지는 않다.

사랑에 빠지면 태양이 더 환하게 비추고 모든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고 다가온다. 깊은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난 사랑이 명확한 사고를 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랑할 때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 활동적이 되거든.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물론 그 외양은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전과 후의 모습은 마치 불 꺼진 램프와 타오르고 있는 램프만큼이나 다르다. 어느 쪽이든 램프는 거기 존재하는 것이고 그게 좋은 램프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램프는 빛을 발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램프의 기능 아니냐.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자기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이 되어간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스가 그들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게 이상하다. 여기 헤이그에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세계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지.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내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유의 인간들이란!” 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에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그래, 그런 일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런 장면은 사람들이 가장 진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한마디로 스스로 자기 입을 막고 자신의 날개를 자르는 짓이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집시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지만, 한번 생각해봐라. 세상에는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촛불을 끌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리 소화기를 들이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1883년 3월 21~28일              (P94-96)    

 

〈삶의 여백〉 

테오에게...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년 10월                (P115)     

〈불확실한 미래〉

테오에게... 

편지와 돈 고맙게 받았다. 설령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림을 그리는 데 든 돈을 고스란히 되찾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가족들은 아주 잘 지내지만, 그래도 그들을 보면 슬프다”라고 쓴 네 편지를 읽고 마음이 아팠다. 네가 결혼한다면 어머니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지. 네 건강과 일을 위해서라도 독신으로 지내서는 안 될 테고. 하지만 나는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따금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벌써 그런 느낌이 갖는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 반대여야 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가끔은 이 지긋지긋한 그림에 염증을 느끼기도 한다. 어디선가 리슈팽이 그랬지.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만든다”고. 그건 정말 옳은 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 역시 예술에 대해 넌더리를 내게 만든다.

가끔 내가 이미 늙고 쇠약해져 버린 느낌이 든다. 그림에 이토록 열성적이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성공하려면 야망을 가져야 하는데, 내겐 야망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네게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에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열심히 그림 실력을 쌓아서 네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당당하게 내 그림들을 보여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남부 어딘가로 내려가서 인간적으로 구역질나는 많은 화가들을 보지 않고 지낼 테다.

어제 탕기 영감을 만났다. 그는 내가 막 완성한 그림을 가게 진열장에 걸었단다. 네가 떠난 후 네 점을 완성했고 지금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길고 큰 그림들을 팔기는 어렵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야외의 신선함과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식당이나 시골집의 장식에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젠가 네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면 너도 다른 화상들처럼 시골에 집을 살 수도 있을 게다. 네가 안락한 생활을 하려면 더 많은 돈을 써야겠지만, 그런 식으로 기반을 형성하는 것 아니겠니. 요즘은 누추해 보이는 것보다 부유해 보이는 것이 훨씬 유리하거든. 자살하는 것보다 유쾌한 삶을 사는 게 더 낫다.

1887년 여름                    (P146-148)    

 

〈모두가 낯설게 보인다〉

테오에게...

최근 며칠간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서 집에서 작업했다. 그 그림을 베르나르에게 부치는 편지에 스케치했다. 그 그림은 유리창에 굵은 선으로 데생한 후 색칠한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요즘 모파상의 <피에르와 장>을 읽는 중인데, 참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서문을 읽어보았니? 서문에는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고, 더 단순하며, 훨씬 큰 위안을 줄 수 있게 과장하고 창조할 자유가 있다”고 씌어 있다. 그 다음에 “재능은 오랜 인내로 생겨나고, 창의성은 강한 의지와 충실한 관찰을 통한 노력으로 생긴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곳에는 고딕 양식의 회랑이 있는데 요즘 들어 아주 멋지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그 회랑은 이해할 수 없는 중국어가 들리는 악몽처럼 차갑고 기괴한 느낌이어서, 아무리 위대한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다른 세계의 것처럼 느껴진다. 네로가 지배하던 고대 로마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걸 다행스럽게 여긴다.

낯설게 보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알제리 군인들, 사창가, 처음으로 성체 배령(拜領)을 하러 가는 귀여운 아를의 아이들, 미사복을 입은 신부들, 위험한 코뿔소를 닮은 사람들, 압생트(압생트 식물에서 추출한 독한 술로 초록빛을 띠며 중독성이 강하다)를 마시는 사람들..... 이 모두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인다. 내가 예술적 환경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기보다는 농담을 하는 쪽이 더 낫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 파리에는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겠지.

1888년 3월                 (P165)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테오에게... 

이 빌어먹을 건강 문제만 아니라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겠다. 그러나 파리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내 위장이 너무 약해진 것도 그곳에서 싸구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지. 여기에도 싸구려 포도주가 많지만 거의 마시지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끈기뿐이다. 우리가 이미 많은 돈을 이 빌어먹을 그림에 쏟아부었으니, 그림이 그동안 들어간 돈을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새 작업실은 두 사람이 지내기에도 괜찮을 것 같아서, 혹시 고갱이 남부로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어쩌면 맥 나이트와 함께 지낼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집에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겠지.

아틀리에가 너무 커서 아무리 무던한 여자라도 이곳에 살 마음을 갖지는 못할 것 같고, 그러니 여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 해도 함께 살기는 힘들 것 같다. 물론 이곳은 파리만큼 비인간적이거나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내 기질상 결혼생활과 작품생활을 동시에 해 나가는 건 힘들 것 같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겠지. 물론 그런 건 진정한 행복도 아니고 진정한 삶도 아니겠지. 그러니 도대체 뭘 원하겠니?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이 예술적 삶조차도 나에게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지.

1888년 5월 1일                    (P171)     

〈그림은 사진이 아니다〉

테오에게... 

피사로는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부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효과를 대담하게 과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정말 옳은 말이다. 그건 데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고 색칠하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888년 6월                    (P185-186) 

    

〈나에겐 그림밖에 없다〉

테오에게...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림을 그린 캔버스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 이상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 사실이 나에게 그림을 그릴 권리를 주며,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래,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림은 나에게 건강을 잃은 앙상한 몸뚱아리만 남겨주었고, 내 머리는 박애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 아주 돌아버렸지, 넌 어떠냐. 넌 내 생활을 위해 벌써 15만 프랑가량의 돈을 썼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계획한 일의 배후에는 늘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계획을 짠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아닐 테니, 우리 처지가 불안정하다는 걸 걱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상황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면 눈을 크게 뜨고 일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행동하면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무언가 남겠지.

고갱이 난관에 봉착한 걸 볼 때, 아무런 예상도 하지 말자. 그저 그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출구가 있기를 바라자. 불길한 가능성을 미리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던져버린 채 작업을 하다가, 습작을 완성하면 비로소 깨어난다. 작품 속에 있던 비바람이 계속해서 휘몰아칠 때면, 잠시 취하기 위해 한잔 마시곤 한다. 그것은 미련과 후회 앞에서 미쳐버리는 것과 같다.

전에는 내가 화가라는 생각을 지금처럼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 그림은 기분전환으로 사냥감을 쫓아다니는 미친 사람들에게 토끼 사냥이 의미하는 것과 같게 되었다. 

집중력이 좀더 나아졌고 손은 더 확신에 차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고 감히 너에게 말할 수 있다. 나에겐 그림밖에 없다.

공쿠르 형제의 글을 읽어보면, 쥘 뒤프레도 미친놈처럼 보였다던데, 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니? 쥘 뒤프레는 그를 후원해 주는 예술애호가를 만났다지, 나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너에게 지우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이곳에 오면서 겪었던 발작 후에 나는 더 이상 어떤 계획도 세울 수가 없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건강은 확실히 좋아졌지만 희망이나 무언가를 이루려는 욕망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이제는 오직 필요에 의해, 정신적으로 너무 많이 고통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그림을 그릴 뿐이다.

1888년 7월                    (P194-196)  

   

〈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고갱에게... 

자네에게 깊은 우정을 전하기 위해 퇴원하자마자 편지를 쓰네. 병원에서 자네 생각을 많이 했네. 높은 열에 시달리고 정신이 희미해진 순간에도.

그런데 내 동생 테오가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이제 내 동생을 안심시켜 주겠지. 그리고 부탁인데, 모든 일이 늘 좋아지고 있는 이 멋진 세상에서 결코 어떤 악의도 없었다는 점을 자네도 분명히 알아주기 바라네.

슈페네커에게 안부를 전해주기를, 우리의 초라하고 작은 노란집에 대해 나쁜 말을 삼가주기를 바라네. 또 파리에서 내가 알고 지내던 화가들에게 안부를 전해주게. 파리에서의 행운과 번영을 기원하네.

추신: 룰랭은 나에게 정말 친절했네. 다른 누구보다 먼저 나를 퇴원시킬 생각을 했던 사람이네.

부디 답장을 보내주기를.

1888년 12월                        (P227)  

   

〈내 영혼을 주겠다〉

테오에게... 

내 건강과 작업이 진행되는 속도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몇 자 적는다. 요즘은 한 달 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 팔다리가 부러져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의 뇌가 망가져도 낫는다는 건 몰랐단다.

이전이라면 감히 바랄 수도 없었을 정도로 좋아지고 있다는 데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몸이 더 좋아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휩싸이곤 한다.

네가 이곳에 왔을 때 고갱의 방에 걸려 있던 30호짜리 해바라기 그림 두점을 봤을 거라 생각한다. 조금 전에 그 복제 그림을 마무리했다. 원래 그림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이 그림들 외에 내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작업중이던 ‘롤랭 부인의 초상’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요즘 이것을 복제한 두 점의 그림도 진행중이다.

전에 고갱에게 이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말한 적이 있다. 아이슬란드의 어부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지. 막막한 바다 위에서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지내는 그들으 서글픈 고독을 생각해보자.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동시에 순교자의 모습을 지닌 그 어부들이 고기잡이 배의 선실에서 바라보면 좋을 그림, 어린 시절 요람에서 흔들리던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어릴 때 듣던 자장가가 떠오르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이 그림은 싸구려 가게에서 파는 서툰 판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이 분홍색 꽃 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벽지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생소할 정도로 거친 분홍색, 거친 오렌지색, 거친 초록색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부조화를 이루면서도 단조로운 빨간색과 초록색 덕분에 나름의 온화함을 회복한다.

난 이 그림이 해바라기 그림들 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이 그림고 같은 크기의 해바라기 그림들은 양쪽 옆에 세워둔 큰 촛대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두 7~9점을 걸어두면 어떨까.

아직 한겨울이니 제발 조용히 작업할 수 있게 내버려다오. 그 결과가 미친 사람이 그린 그림에 불과하더라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제 참을 수 없는 환각도 사라졌고, 악몽을 꾸는 일밖에 없다. 칼륨 정제를 복용한 덕분이 아닐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내가 정말 잘못했다면 나를 가둔다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그냥 그림을 그릴 수 있게만 해준다면 약속한 주의사항을 모두 지키도록 하마.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 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 그림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우리는 모두 한 사슬에 연결된 고리에 불과하다. 고갱과 나는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한다. 만일 우리가 약간 미쳤다면, 그래서 어떻단 말이냐? 우리는 붓을 이용해서 온갖 혐의에 반박하는 철저한 예술가 아니냐? 어쩌면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노이로제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해독제도 존재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들라크루아에게서,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에게서 그런 해독제를 얻는 것 아닐까? 나 역시 예술가의 광기에 감염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생겨나는 해독제와 위안물이야말로 조금의 선한 의지와 함께 충분한 보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889년 1월 28일             (P234-236)   

   

〈화가, 보이는 것에 빠져 있는 사람〉

테오에게... 

너희 부부가 곧 받아보게 될 그림을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팠던 동안 비와 함께 눈이 왔나 보더라. 풍경을 보기 위해 밤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 번도, 결코 한 번도 자연에서 그토록 가슴 아프고, 그토록 감동적인 인상을 받아본 적은 없다.

이곳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슬프게 한다. 사실 그 말은 꽤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가면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

1889년 12월                   (P279)

     

〈고통은 광기보다 강하다〉

테오에게...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하느님 맙소사! 1년이 넘도록 참아왔으니 이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 지루함과 슬픔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급하다.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그러니 너에게 묻는데, 왜 그렇게 두려워하니? 네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다. 맙소사! 이곳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미쳐가는 모습을 보아 왔다. 더 중요한 것은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그렇게 냉정한 감시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감시하에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 자유를 희생하고 사는 것, 기분전환을 할 방법이라고는 오직 그림 그리는 일뿐인 채 사회에서 동떨어져서 지내는 것, 그런 건 정말 못할 짓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얼굴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 주름살까지 생겼다. 이제 이곳의 모든 것이 나로서는 참을 수 없게 여겨지는 이상 그걸 끝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제발 페이롱 씨에게 내가 떠나는 걸 허락해 달라고 말해 다오. 늦어도 15일까지는. 그렇지 않으면 발작이 일어난 후 다음 발작까지 유지되는 안정기를 놓쳐버리게 된다. 지금 떠난다면 다른 의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또 병이 빨리 재발한다 해도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따라서 내가 계속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지, 정신병원에 영영 처박혀 있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지난번 편지에도 말했듯, 환자들이 들판이나 작업장에서 일을 하는 병원으로 가고 싶다. 이곳보다는 그런 곳에서 그림의 소재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혼자 움직이는 데도 비용이 많이 드는데, 또 동행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일 듯싶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나에게도 있다는 걸 기억해 줬으면 한다. 내가 완전한 자유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노력해 왔다. 나는 이제까지 다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위험한 동물이라도 되는 양 감시원을 붙이려는 건 너무 부당하지 않니? 아니, 거절하겠다. 내가 여행중에 발작을 일으킨다면, 기차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되어서 아주 고통스럽다. 고통은 광기보다 강한 법이다.

페이롱 씨가 먼저 나서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책임질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일이 계속 지체될 거고, 결국 우리는 지쳐서 서로 화만 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의 인내심이 극에 이르고 있다.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임시변통에 불과하더라도.

1890년 5월 4일           (P291-294)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

테오에게... 

다정한 편지, 그리고 50프랑 고맙게 잘 받았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다 쓸데없는 일이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그 사람들이 네게 호의적이기를 바란다.

네 가정의 평화 문제에 대해 나를 안심시키려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그 화복을 봤으니까. 4층에 있는 집에서 사내아이를 기르는 일이 제수씨뿐 아니라 네게도 힘겨운 일이란 건 잘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잘 되고 있으니 내가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겠니? 침착하게 사업 얘기를 나누려면 시간이 좀더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화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든, 돈 이야기는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래, 정말 우리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늘 말해 왔고 다시 한 번 말하건데, 나는 네가 단순한 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너는 나를 통해서 직접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도 그 그림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상황에서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죽은 화가의 그림을 파는 화상과 살아 있는 화가의 그림을 파는 화상 사이에는 아주 긴장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지. 그런 건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네 입장을 정하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넌 뭘 바라는 것이냐?

(이 편지는 7월 29일 고흐가 사망할 당시 지니고 있던 것인데, 그동안 그가 쓴 마지막 편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1890년 7월 24일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내용이 너무 우울해서 부치지 않았다고 한다.)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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